|김영환 은퇴장로의 기도, 교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다 |성경에 소개된 부르심을 받은 여인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 |성경, 남여노소 모두 부르심을 받았다 |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인 ‘위대한 부르심’에서 강조된 3가지 |‘적당하게’의 마지노선을 넘어라 |하나님의 부르심엔 ‘은혜의 삶’이 있다
명성교회 3월 특별새벽집회 마지막날인 3월 4일 김영환 은퇴장로의 기도가 명성교회 교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43년 전 명일동의 작은 소리로 개척한 명성교회. 개척교회 목사님은 의지할 곳 의지하려 없어 오직 주님 한 분만 바라보고 25명 성도들과 함께 새벽기도의 줄을 붙잡았습니다.
3월, 9월 특별새벽집회로 한달씩 하늘에서 내리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오직 믿음으로 기다리고 구하셨습니다.
이제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큰 나무로 자라나서 천천만만 성도들이 십자가 그늘 아래 엎드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며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나이다.
오대양 육대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러 복음의 나팔을 불게 하시고 구원의 큰 북을 힘차게 울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명성교회가 받은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을 오늘 위대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의 조국 자유대한민국과 북한의 불쌍한 형제들을 복음으로 구원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며 이웃과 형제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먼저 섬겨 주님 마음에 합한 성도들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사랑하시고 귀히 쓰는 원로 목사님 기도로 늘 앞장서 새벽을 깨우시고, 세워주신 명성교회와 교단 총회장으로 WCC 10차 부산총회 준비위원장으로 온 세계 형제 교회와 이웃 성김을 앞장서 몸소 본을 보이게 해 주신 것을 감사 감사드립니다.
모세가 홍해를 향해 들었던 믿음과 능력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명령 따라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에게 좌로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며 물려주셨습니다.
세워주신 김하나 담임목사님 주님 상주심을 바라보고 주님 목적인 목회 사역을 잘 계승하고 발전하여 날마다 부흥하게 하시고 더 넓게 섬기게 하시고, 우리 명성교회 성도들의 가정에 자손만대에 축복이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담임 목사님 위대한 부르심 제하의 주의 말씀을 대언하실 때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말씀을 받는 우리 모두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는 기적의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어서 구약 성경 룻기 2장 8절에서 13절까지의 성경본문을 김병찬 이복순 두 집사가 봉독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리고 교육부와 청년대학부 연합찬양대의 찬양이 있은 후 김하나 목사의 설교가 이어졌다.
원주 수양관과 제주 수양관 안동성소병원과 명성교회 지교회들과 분립 개척교회들, 김 목사가 공부했던 드루대학 교수들과 5명의 학생들, 월드비전 회장, 영주 영광여중고 교장과 교감, 교목,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민경준 총장, 한국기독공보 안홍철 사장, 증경총회장 유의웅 원로 목사와 여러 원로목사 등이 참여한 가운데 특별새벽집회 마지막 날 김하나 목사는 먼저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 받아주시고 마지막 날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넨 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룻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가 이번에 위대한 부르심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성경의 중요한 인물들에게 어떠한 부르심과 어떠한 섬김의 모습이 함께 있었는지를 계속해서 찾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시작을 아브라함으로 했더니 갈 길이 멀어요. 성경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을 하고 여호수아를 하고 그리고 이제 누군가를 해야되는데 우리가 새벽 예배로는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그래서 새벽 예배에 그래도 여성을 한번 다루어야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여자도 부르심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룻을 갖고 여러분께 좀 은혜를 나누고 또 하나님 맞추신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일종의 프로젝트예요. 이걸 어떻게 여러분에게 정말 다양한 인물들과 다양한 상황들과 또한 다양한 부르심이 있는지를 이 폭의 하나님의 넓으심이 또 하나님의 깊으심을 여러분께 잘 전해드리는 것이 저희 프로젝트고 그래서 여성으로서 룻을 여러분께 소개를 드리는 겁니다.”
김 목사의 설교 전문을 소개한다.
◆ 성경에 소개된 부르심을 받은 여인들
“성경에는 부르심을 받은 다양한 여인들 여성들이 있습니다. 사라와 리브가, 얼마나 귀한 부르심입니까? 근데 리브가 말씀만 봐도 그래요. 굉장히 지혜롭고 또 믿음이 아주 뛰어납니다. 참 고귀한 모습을 가졌던 것을 저희가 기억합니다.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이방 여인이죠. 여리고성에 살았던 기생 라합 또한 어떻습니까? 굉장히 극적인 장면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또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는 스스로를 여호와의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던 것, 남편의 제사와 다르게 자신의 기도로 나아갔던 그러니까 남성의 제사도 있었어요. 굉장히 뛰어난 믿음을 가진 남편도 있었지만 한나가 독립적으로 자신도 주님께 따로 기도하면 나갔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거든요. 그렇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신약에 가면 예수님의 주변에 뛰어난 여성 제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에 여성의 기사가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초대교회에서도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들을 받고 또한 부르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봅니다.
그래서 여성은 이런 표현이 저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보조적인 역할이 아닙니다. 남성을 보조하는 것이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고유한 역할이 있었습니다. 여성을 위한 부르심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현대 교회도 우리가 뭐 세보지 않아도 우리 명성교회는 사실 남성들이 굉장히 많은 편이에요. 새벽예배 이렇게 많은 남성들이 이 앞에도 강대상에도 우리 남자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앉아있는지 우리 남성이 많은 건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도 따져보면 여자가 조금 더 많을걸요. 51%, 52% 최소한 여자가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회중석을 반 이상은 여성들이 채우고 있고, 또한 여선교회와 구역장과 다양한 곳에서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는 섬기는 참 귀한 종들이 여성입니다.
◆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
하지만 우리 가운데 여성을 향한 차별과 또한 편견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가 미국 교회사 얘기를 잠깐만 좀 드릴게요. 왜냐하면 제가 한국 교회사 전공이 아니라 미국 교회사 전공이라서 제가 조금 더 교회사 쪽으로는 미국 쪽을 알아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의 초대 총독 존 윈트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이라는 사회 자체를 구상한 사람이에요. ‘씨티 오버 힐’이라고 해서 언덕 위의 도시 빛을 등경 속에 감출 수 없고, 언덕의 도시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회가 이 세상이 비추는 빛이 되어서 새로운 예루살렘과 새로운 이스라엘로 온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니 믿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겠습니까?
근데 이분의 눈에 거슬리는 여자 한 명이 있었어요. 자기 교회 앞에 보스턴에 있는 자기 집 앞에 교회가 있었어요. 자기도 거기를 다녀요. 근데 거기 앤 허친슨이라고 하는 여성이 교회를 계속해서 왔다갔다 하면서 리더십을 갖게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성경공부를 감히 여자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주변의 여성들을 모읍니다. 그러면서 또 들리는 소문을 듣자 하니 이 에너친슨이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얘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잘 됐다 요거 잡자라고 해서 재판을 엽니다. 결국엔 앤 허친슨을 재판에서 유죄로 만들어낸 다음에 앤 허친슨을 뉴욕주 저 광활한 완전히 인디언만 있는 쪽으로 쫓아내서 결국 거기서 이 여자가 죽게 되죠.
이런 여성이 갖고 있는 리더십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다는 것은 아예 우리 교회 초기부터 있었던 사실입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19세기에 대부흥운동 대각성 운동이죠. 대각성 운동이 있은 다음에 교회들이 막 부흥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때 여성들도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여성성을 감추어야 했어요. 여성은 말씀을 전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여성성을 감춰서 그 당시에는 목회자들이 가발을 썼던 때입니다. 영국 스타일로 남자의 가발을 쓰고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처럼 목소리를 내야만 그나마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가서야 여성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나님의 사역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되어서 그때서야 조금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부르심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그런 편견이 많았습니다.
부흥의 시대를 돌아보면 많은 부흥사들이 무엇을 간증했냐면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우리도 보통 대부분 자격이 부족하거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예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핍박하던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자격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걸 가져올 수가 없어 내가 어느 신학교 출신이고 내가 누구를 잘 알고 이런 걸 할 수 없으니까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자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만난 사건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전적으로 변화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근거를 갖게 되는 거거든요.
부흥사 중에서 무디라든지 핀이라든지 유명한 분들은 다 예수님 만난 간증이 깊히 있었어요. 여성들도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아주 중요하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모르시는 이름들이지만 미국 교회에서 중요한 여성 지도자들 소저 트루스라든지 조나단 리 이런 사람들이 다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전한 이유가 바로 다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 성경, 남여노소 모두 부르심을 받았다
자 이제 어려운 얘기 끝났습니다. 교회사 얘기는 끝났고요. 그러면 우리들도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아주 특별한 간증이 있어야만 여선교회 회장하고 구역장하고 또 기도하고 이런 거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는 거죠.
우리 이 시대는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한 시대입니다. 남자만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거죠.
하나님은 남자만 부르시지 않고 그렇다고 또 여자만 부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은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계획을 넘어서시는 거죠. 배운 사람만 부름받는 것도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만 부름받는 것도 아닙니다. 성별과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침 우리 기도를 은퇴 장로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제가 일부러 토요일 날 새벽 예배는 우리 은퇴 장로님이 좀 기도해 주시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 처음 기도 시작이 그렇잖아요. 43년 전에 우리 교회 역사를 다 아시는 장로님이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이를 뛰어넘은 부르심을 꼭 붙잡으셔야 합니다. 은퇴하신 분들도 부르심이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도 부르심이 있습니다. 연약한 분들 힘이 없는 분들 건강이 안 좋은 분들도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도 부르심이 있습니다. 모두에게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요. 제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 룻기와 에스더서의 공통점
오늘 우리는 룻기를 통해서 한 이방 여인을 특별히 모든 꿈들이 깨어져버린 소망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이 과부인 이방여인 룻을 부르셔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고 이 여인이 베풀었던 헤세드죠. 은혜를, 그 인자함을 인애함을 그 선대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너졌던 삶들을 일으켜주시고. 썼어요 그래서 나오미가 고백을 하잖아요. 내 이름을 나오미라고 하지 마라. 내 이름은 마라다. 출애굽기에도 나온 쓴물 마라잖아요. 나는 쓴 사람이다. 입에 대기만 해도 너무 쓴 인생인데, 그 인생을 하나님께서 바꿔주시고 복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꿈이 무너질 때, 우리 꿈이 부서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꼭 만나야 합니다.
룻기가 여러 면에서 굉장히 특별한 말씀입니다. 우선 이 성경책은 하나님의 이름이 많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어떤 기적들, 역사들, 특별한 사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거를 우리가 출애굽기랑 비교하면은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사사기 바로 전 책인 사사기만 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근데 룻기에 딱 들어가면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고 역사하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오직 화자들 여기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할 뿐입니다.
근데 흥미롭게도 여러분 성경에 여성의 이름으로 된 책들이 많지 않은데 룻기와 또 뭐가 있을까요? 에스더서
룻기와 에스더가 아주 흥미롭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하나님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아요. 특별히 애스더서 같은 경우에는 아예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포로로 잡혀가 있는 시대 아닙니까? 에스더 시대는 이방 나라예요. 이방 땅에 이방 신들이 들끓는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아요. 그런데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이방 땅이고 이방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다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모든 우연 같은 장면 속에서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고 왕의 밤에 잠을 안 재우시고 왕의 실록을 읽게 하시고 거기 가운데 놀라운 사건들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에스더를 왕으로 집어넣으신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 룻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룻기에 하나님의 대단한 능력들이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룻에게 역사하여주셨고, 륫의 삶을 인도해 주셨고, 모든 우연처럼 보이는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부르신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룻에게 있는 모든 깨어진 것들을 다시 붙여주시고 고쳐주신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또 룻기는요. 읽어보면 이게 상당히 은혜가 될 수도 있지만 전혀 은혜가 안 되는 분들도 있어요. 먼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적용하시는 분들이 많냐 하면 ‘시어머니한테 잘해라’ 이걸로 끝내시는 분들이 있어요. 룻기봐라 시어머니한테 잘하니까 복 받지.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의하세요, 동의하지 않았어요. 저는 동의하거든요. 시어머니한테 잘한 거잖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가장 잘하기 힘든 사람이 누구예요? 시어머니예요. 근데 그 시어머니를 위해서 완전히 희생한 사람이 룻이니까 결론을 그렇게 낼 수도 있어요. 또 하나의 결론이 뭡니까? 돈 많은 남자 잡아라. 우리 인생이 무너져도 땅많고 돈많은 착한 남자 잡으면 일어설 수 있다. 이거 아멘 안 나오시죠?
근데 이게 어떻게 보면 딱 두 가지 틀이에요. 시어머니한테 잘하는 것과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인생을 역전하는 것. 우리 끝낼까요 여러분? 그런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절대로 룻기는 그런 목적을 갖고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룻기에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깨어진 인생을 어떻게 다시 살려주시는지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꿈이 깨어지고 우리 소망이 무너지고, 우리가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불러주신다라는 거예요.
아무런 의지할 것 없는 이 두 명의 여인이 두 명의 과부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삶 속에서 다시 새롭게 꽃 피어나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꿈이 무너진 곳에서 우리로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다시 불러주십니다.
룻기에는 깨어진 꿈들이 가득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 모압으로 내려갔는데 나오미의 남편은 죽고 두 아들도 죽고 인생의 패배자처럼 고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룻기는 시대적 상황과 굉장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기 1장 1절을 보면 어떻게 시작하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 사사시대라는 거예요. 사사시대의 특징이 여러분 무엇일까요? 룻기 1장 1절 바로 전절은 사사기 마지막 절이잖아요. 사사기 마지막 절 21장 25절 말씀을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 이게 시대적 상황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때에. 그리고 그 바로 다음 말씀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엘리멜렉이 자기의 집을 다 데리고 잘 살기 위해서 자기의 소견에 좋은 데로 모합으로 내려가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엘리멜렉의 꿈은 시대를 닮아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벗어나서 잘 살기를 원했습니다. 근데 이러면 이게 꿈이죠. 지금도 더 좋은 환경을 위해서 이민을 가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종과 국경을 넘어 가정을 이루는데 꿈이죠.
꿈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꿈이 잘못된 것입니까? 잘못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꿈이 산산조각 날 때가 있다라는 거예요.
바울도 꿈을 쫓아갔습니다. 사울일 때 꿈을 쫓아갔어요. 근데 그 꿈이 깨어지면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 부르심과 꿈의 차이
부르심과 꿈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심은 깨어져도 온전합니다. 부르심은 아무리 깨어지고 깨어져도 부르심은 변하지 않고 온전합니다. 하지만 꿈이 깨워지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거죠.
그 꿈이 무너진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붙잡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깨어진 꿈을 하나님의 부르심이 회복시키십니다. 그것이 바로 베들레헴으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듣는 거죠.
여러분 부르심은 들어야 되잖아요. 듣는 귀를 열어야 하잖아요? 듣는거로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룻기 1장 6절을 보면 베들레헴에 어떻게 돌아가게 됐는지 그 배경이 적혀있습니다.
들음으로 인해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부르심은 바로 이렇게 듣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질문입니다.
◆ 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인 ‘위대한 부르심’에서 강조된 3가지
이번 특별 새벽집회를 통해서 지금까지 강조해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부르심이 낮은 자가 되는 것, 종이 되는 거, 그리고 섬기라고 부르신 것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을 꼭 끝까지 붙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부르심은 높은 자리에 유명한 자리에 대단한 자리에 부르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섬기도록 부르신 부르심이라는 거예요. 근데 은혜로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또 다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섬긴다는 거예요. 은혜는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일 낮 예배를 통해서 또 강해 말씀을 통해서 헤세드에 대해서 여러 번 나눈 적이 있습니다. 헤세드는 구약의 아주 중요한 개념이죠. 은혜, 선대, 자비, 인애 뜻을 갖고 있습니다.
룻기는 헤세드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이 은혜 헤세드의 부르심을 받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기고 베들레헴으로 룻은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내 느낌대로, 나 좋은 대로 행하던 시대에 룻은 전혀 다른 가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신이 되셔서 우리를 섬겨주신 것처럼 룻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던 시대에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희생과 섬김을 보여주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사사기를 강해하면서 정말 많이 느끼는 것이 이 시대가 사사시대를 너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바로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나의 행복, 나만 좋으면 돼 우리 가족만 좋으면 돼.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모습이 여기 있어요.
우리의 부르심은 룻의 부르심입니다. 은혜로의 부르심. 섬김의 부르심. 나를 희생하고 나를 낮추고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희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곳에 보상해 주시고 은혜를 되돌려주신다는 그 가르침이 오늘 룻기에서 찾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적당하게’의 마지노선을 넘어라
우리 대부분 사람들이 마지노선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적당하게, 그 이상은 안 하려고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해도 믿음 생활을 해도 적당하게 해. 그래서 주일만 나가면 됐지 뭘 더 하려고 그러냐. 예배만 나가면 됐지 뭘 봉사를 하려고 그러느냐. 우리는 절대로 희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하나님 믿고 사람들과도 적당한 선에서 살려고 하죠. 근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르심에 적당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너는 가정을 뒤로, 가족을 뒤로하고 너의 가업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런 십자가 지는 것이 적당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적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안에는 우리가 적당하게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적당히 사랑하셨다면 예수를 왜 보내주셨고, 적당히 사랑하신다면 우리의 죄를 왜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그 선을 넘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 오르바 같은 인생이 아니라 룻과 같은 삶을 살아야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부르심은 오르바처럼 적당하게 시어머니 따라가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라고 하니까 ‘그래요 어머니 이 정도까지 제가 따라온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저 이제 저의 삶 살로 갑니다. 저 이제 새로운 남자 만나야 되고요. 젊은 인생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제 인생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죠.
근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오르바 같은 인생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같이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 같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 믿는 사람처럼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항상 선을 넘는 희생과 섬김을 요구합니다.
룻은 누가 봐도 필요 이상의 희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부르심의 룻을 응답하셨고 룻에게 한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가정의 구원과 그리고 다윗의 가문으로서 이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은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고 나의 행복과 나의 기쁨과 나의 삶의 중심으로 살라고 하죠. 하지만 은혜는 절대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선을 넘었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해줄 때 그냥 잘해주는 게 있고요. 선을 넘어서 잘해주는 게 있습니다. 선을 넘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감동이 있어요. 그래서 은혜가 감동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 선을 넘어서 우리에게 해주시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적당한 정도 하는 것은 우리가 보상이라고 합니다.
보상도 좋지만 우리는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르바가 떠나가고 룻만 남았어요. 룻이 돌아가도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어요. 그 정도하면 잘한 겁니다. 그런데 룻은 소망이 아니라 희생을 택합니다. 자기 시어머니를 위해서 남은 인생을 드린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름다운 삶을 젊음을 포기했습니다. 젊은 여자가 몇 살이나 됐겠습니까? 십 대 후반 아니면 20대 초반 아니겠습니까? 이 젊고 젊은 여인이 자기의 젊음을 시어머니를 위해서 내려놓고 포기한 거예요.
자기에게 익숙했던 모든 문화와 음식과 관습과 언어를 다 내려놓고 그의 시어머니를 쫓아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로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은혜를 가질 때 은혜로의 부르심을 감당할 때 또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 우리 인생에 우연은 없습니다
룻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침 보리를 추수하던 때였어요. 근데 이게 참 감사하면서도 잔인한 타이밍입니다.
여러분, 남들이 잔치할 때 남들이 먹을 것으로 가득할 때 내가 먹을 것이 없다? 이처럼 슬프고 잔인한 것이 없는 겁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 두 사람은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 더욱 슬픈 것이죠. 자, 근데 2장에서 2장이 시작할 때 나오미가 얘기를 하죠. 우리 먹을 것을 좀 찾아야 되지 않겠냐.
여러분 잘 보십시오. 룻기 2장과 3장은 1장과 전혀 다릅니다. 1장과 2장 3장은 다 사람들의 계획으로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엘리멜렉이 계획을 해서 우리 모압으로 가자였어요. 근데 그것은 실패합니다.
인간적인 꿈들이 실패하죠. 2장과 3장은 나오미와 룻이 계획을 갖는 것입니다. 2장에는 음식을 찾는 계획이고요. 3장에는 보아스를 그들의 구원하는 친족으로 삼는 일들을 계획을 삼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근데 1장의 실패를 이어서 2장과 3장에 룻과 나오미 계획들은 다 성공합니다. 왜 성공할까요?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룻기가 보여주는 우리의 계획과 무엇이 성공하고 무엇이 실패하는지를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대비입니다. 그래서 2장에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죠.
여기를 보면 우연히 그곳에 임한 것 같아요. 한번 보십시오. 2장 3절과 4절 말씀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에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멘!
룻과 나오미가 계획을 했는데요.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중요한 겁니다.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고요.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왔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것이 에스더와 룻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연히 간 것 같지만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마침 온 것이지만 마침 온 게 아니에요. 마침 하나님이 보내주신 거예요. 이 모든 것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은혜로 이끌어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 바로 favor를 100% 주시는 거예요. 보아스는 룻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아, 너 이방 여인 그 여인이구나 너 참 귀하다는 그 사람이구나. 너는 복이 있을지어다 너 다 가져가라’고 주게 되는 거예요.
◆ 하나님의 부르심엔 ‘은혜의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로 살면 하나님은 그 이야기가 전파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나불나불대지 않아도 내가 나를 막 스피커 크게 열고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거룩한 사람인지 은혜로운 사람인지 알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합니다.
야 그 집사님 참 은혜로운 사람이다. 그 청년 참 귀한 사람이야.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지 몰라. 여러분들의 모든 희생과 섬김이 전파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룻이 뭐라고 오늘 얘기합니까?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내게 은혜가 돌아왔다는 거예요. 2장 10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저기 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룻은 몰랐어요. 내가 왜 은혜를 받는지 몰랐어요. 우리가 왜 은혜를 받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거예요. 내가 왜 은혜를 받습니까.
여러분 은혜로의 부르심을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은혜로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은혜의 삶, 희생의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내가 왜 은혜받는지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다 예비하셔서 주신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압의 풍성한 삶은 그 꿈은 깨어졌지만 2장과 3장에 각각 나오는 나오미와 룻의 계획들은 하나님의 보상을 다 받아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부르심 속에 살아갈 때 우리의 계획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은혜가 화려해서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멋지고 화려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희생과 섬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되돌아오는 감동이 바로 은혜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은혜보다는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로 섬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오늘 이 아침에 주시는 은혜로의 부르심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은혜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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