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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용 목사 저, “우리가 위그노다”… 배안호 박사 서평

오병훈 국장 | 기사입력 2024/12/09 [15:10]

성원용 목사 저, “우리가 위그노다”… 배안호 박사 서평

오병훈 국장 | 입력 : 2024/12/0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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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안호 박사(영국 선교사, 전 총신대 칼빈대 명지대 교수)    

 

 

들어가는 말(서론): 당신은 위그노를 아는가 세상을 바꾼 위그노들의 이야기”(부제)

우리가 21세기 디아스포라 위그노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함을 살수록 깨닫는다. 더구나 크리스천이라면 훤히 알고 있어야 할 상식(常識)을 제대로 모를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우리는 위그노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다. “위그노가 뭐꼬?”하는 자도 많을 듯하다.

 

위그노(Huguenots)16-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혹자는 그런 남의 나라, 그것도 과거의 프랑스 개신교인과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질문하고 싶을 것이다. 우문(愚問)중 우문이다. 이제부터 그간 잘 몰랐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서평자는 오랫동안 혼자만의 질문이 있었다. “존 칼빈의 나라 프랑스는 왜 개신교가 그리도 약할 까?” 2017년 프랑스 개신교 총연맹(FPF), 종교개혁 500주년 즈음 발표한 프랑스 개신교인 수는 약 200만명, 전인구(65백만) 대비 3.1%. 왜 이토록 그리스도인이 적을까?

 

<우리가 위그노다>(성원용, 국민북스, 2024)세상을 바꾼 위그노들의 이야기. 성원용 목사는 위그노 전문가다. 서평자는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며 유럽교회사에 등장하는 위그노를 알게 되었다. 그 위그노가, 영국 산업혁명의 기초를 놓았으며, 네덜란드를 업그레이드했으며, 독일 부국의 원천이며, 스위스의 시계 산업을 꽃피웠으며, 나아가 미국 건국의 기둥들이 되었다. 세바시(세상을 바꾼 시간)가 아닌 세바위’(세상을 바꾼 위그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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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용 목사는 위그노 전문가다. 성 목사는 19963월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 29년째 목회자와 선교사, 복음전도와 작가로 살고 있다.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Th.B/M.Div). 파리 개신교 신학교, 미국 미드웨스트 대학원서 리더십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장 통합(PCK) 총회 파송 프랑스 선교사로서 파리 선한장로교회와 한불선교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저서: <본질을 붙들면 후회하지 않는다>, <위그노처럼-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 <위그노처럼>(한 달 묵상집) 이상 국민북스에서 출간하였다.

 

이번 서평은 디아스포라 위그노가 어떻게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디아스포라 위그노가 어떠한 선한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중심으로 서평 할 것이다.

 

1. 디아스포라;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큰 그림에 속한 사람들’ → 모든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은 복음위해 고국에서 뽑아 해외 심은 인생들

 

디아스포라는 누가인가? 소극적 개념은 이산(離散) 혹은 분산(分散)된 자들이다. 그러나 적극적 개념으로 디아스포라는 씨 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디아스포라는 헬라어 디아’(찢어지다 apart)스포라’(흩어 버리다, to scatter 씨앗을 뿌리다, to sow) 합성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큰 그림에 속한 사람들인 셈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땅으로 흩으셨는데 그들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공식적 개념이었다.

 

성경은 신·구약 전부가 디아스포라 이야기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부르셨고 그 아브라함에게 디아스포라 언약을 주셨다(창 12:1-3).

 

이 말씀을 이렇게 풀어 놓을 수 있다. ‘디아스포라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그를 축복하고 받아들이는 자들도 복을 받고, 종국에는 모든 족속이 받을 것이다.’ 성경과 그 이후의 기독교 역사는 이 언약이 이루어져 가는 현장의 기록인 셈이다.” (pp.12-13, 성경은 디아스포라 이야기다)

 

불순종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때(70)가 차매, 고레스 대왕을 세워서 전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민족의 고국 귀환을 명하였다. 당시 약 4만 명이 귀환하였다. 그보다 훨씬 많은 유대인은 바벨론 땅에 남았다. 하나님은 주전 1세기에 이르러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LXX, 셉투어진트)하게 섭리하셔서 초대교회가 각처에 세워지며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게 역사하셨다.

 

예수님도 또한 하늘나라를 떠나 이 땅에 오신 디아스포라였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 에스라 등 성경의 인물들이 디아스포라의 삶을 경험했거나 디아스포라가 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역사를 변화시킨 주인공들이다. (중략) 초대교회 주역이 되었던 바울, 디모데,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이 디아스포라 출신이었다” (p.13, 저자의 프롤로그)

 

2. 영국 산업혁명의 기초를 놓은 디아스포라 위그노: 대영제국의 뿌리가 되다

 

프랑스는 톨레랑스의 나라로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16세기) 프랑스는 가톨릭 절대왕정이 다른 종교와 사상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 사상이 이제 막 싹이 트고 있던 즈음, 프랑스는 중세시대 마녀사냥하듯 종교개혁을 따르는 개신교도(위그노)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짓밟고 죽이는 엄청난 핍박이 자행되었다.

 

낭트 칙령’(1598)과 루이 13(1610)에 이어 루시 14(1643)의 퐁텐블로 칙령(1685) 36년간 이어진 구교와 신교 간의 위그노 전쟁은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개신교의 예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12년 후(1610) 앙리 4세가 파리 한복판에서 대낮에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프랑스는 루이 13(33)과 루이 14는 절대왕정을 추구하며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 하나의 왕이 있을 뿐이라며 위그노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드디어 168510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며 87년전 할아버지(앙리 4)가 선포했던 낭트 칙령을 폐기하였다. 개신교 예배를 전면 금지, 개신교 목사들에게 15일 이내 개종하거나, 프랑스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한마디로 위그노를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의 위그노: 군대/금융/의학/과학 발전을 이끌다…> ‘번성하는 영국 산업

 

영국에 망명한 위그노는 6만 명에 이른다.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에 파리에서 대학살 당시에 상당수가 이주를 시작하였고 나머지는 위그노 대박해 시기(168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 주로 런던에 정착하였다. 당시 영국은 명예혁명(1688) 시기.

 

가톨릭을 표방했던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네델란드의 빌럼이 아내 메리 2세와 함께 영국 국왕 윌리엄 3세로 즉위하였던 시기다. 10년 후에 비국교도를 포함함 개신교 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이 통과되었다. 이어서 영국 의회에서 권리장전(1689)이 통과되며 가톨릭교도는 절대 잉글랜드 국왕이 될 수 없도록 못을 박는 왕위계승법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윌리엄 3세는 네델란드 총독이었다가 영국에 왕위에 올랐다. 그를 따라 당시 네델란드의 위그노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위그노들은 전문지식과 함께 섬유가공.방직/도자기/제지/가구 제작자 등 우수한 기술을 영국으로 가져왔다. 이들 중에 과학자와 군인들도 상당수. 이들은 영국 산업발전에 이바지했고, 훗날 산업혁명(1760-1820)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위그노 특유의 경건과 성실의 근원은 칼빈(칼뱅)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17세기 당시의 퀘이커 교도들처럼 위그노들도 경건하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했다. 칼뱅주의자들은 정직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부는 신성하다고 믿었고, 위그노는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위그노들의 직업은 대부분 기술이 좋은 예술인들, 장인들, 농업인 그리고 전문인들이었다.

 

영국에 온 위그노 중에는 의사, 교사, 상인, 선원, 조선공 그리고 심지어는 귀족도 있었다. 그들은 특유의 경건과 성실로 가는 곳마다 예술과 산업을 꽃피웠다. 이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언급한대로 노동에 대한 칼뱅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착지에서 견고한 위그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p.56)

 

18세기까지 런던에는 31개 위그노 교회가 있었다. 런던시는 위그노들을 위해 분할필즈 근처의 큰 집을 제공했고, 그곳에 위그노들은 병원을 설립했다. 클레켄웰/모트레이크/풀럼/완즈워스가 그들의 거주지였다. 뉴몰든 근처다. 현재 한인사회 거주지다. 이것이 우연일까?

 

3. 독일 부국강병의 원천: “나는 위그노입니다” = “나는 지성인입니다

 

독일은 그때나 지금도 유럽 여러 나라들 중에서 난민에 대해 관대하다. 당시에도 독일은 가장 신속하게/가장 폭넓게/가장 친절하게 위그노를 맞이하였다.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국왕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아 발표되고 불과 20일 만에 포츠담 칙령을 발표! 위그노를 같은 개혁신앙을 가진 형제들로 위그노를 환영한다고 천명했다.

 

위그노 난민을 위한 이동 편의(배편/육로)와 여비/여권/거주할 집까지 파격적인 특혜를 베풀었다. 낭트 칙령 폐지후에는 약 43,000명의 위그노가 프로이센과 브란텐부르코에 정착했다.

 

특별히 베를린과 교외 지역엔 18세기 초까지 5,000명 이상 위그노가 거주. 당시 베를린 인구의 20%에 이르는 규모. 프리드리히 1세는 위그노 난민공동체가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지게 지원하였다.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예배하며 자신들만의 재판제도, 정책,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위그노들은 베를린에서 지성인으로 통했다. “나는 위그노입니다라는 말은 나는 지성인입니다라는 말과 같았다” (pp.64-65, 이 위그노가 오늘날 예수쟁이가 아닐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디아스포라 위그노들을 받아들이면서 꾀했던 프로이센의 부국강병 계획은 성공했다. 그로부터 185년 뒤인 1870년에 벌어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 일명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제2제국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세워졌으며 독일에서는 그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일연방의 모든 회원국이 통합되어 독일 제국이 세워졌다. 위그노를 박해하고 방출했던 프랑스로서는 뼈아픈 순간이었고, 위그노를 따뜻하게 맞이했던 프로이센에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pp.72-73, 위고노는 보배 중 보배)

 

4. 위그노, 네덜란드를 업그레이드 하다.

 

당시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점점 가톨릭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5673월 네덜란드 17개 주가 스페인에 대항 80년 전쟁이 반발. 네덜란드는 공화국을 수립하자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 유럽국제전쟁. .구교 간의 전쟁 진행되었다.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1648) 통해 30년 전쟁이 종식되었다. 개신교가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독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같은 칼빈주의를 따르는 프랑스의 위그노를 환대하였다. 35,000명의 위그노가 이주했다.

 

유명한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 설립(1575) 당시 위그노가 신학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특히 목사/군인/장인들이 유독 더 많았다. 600명 중 400여 명이 목사가 네덜란드에 정착했다. 위그노 목회자의 절반 정도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위그노에게 해방구와 같았다. 종교의 자유를 힘입어 네덜란드를 혁신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가는 곳마다 위그노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중심으로 생활하였다.

 

네덜란드로 건너간 위그노들은 높은 교육 수준과 앞선 기술로 네덜란드의 산업 발전을 견인하였다. 1602년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 세워진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거기에다 무역중개소, 환전은행, 각국 공관 대사관, 전쟁 준비를 위한 공장이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마다 빼곡히 들어섰다. 개신교의 금욕적 윤리와 근면과 성실로 무장한 그들의 삶은 네덜란드에서 자본주의를 활짝 꽃피게 했다.” (p.85, 위그노 개신교 신앙이 나라를 세운 것)

 

5. 스위스 시계산업을 꽃피우다.

 

인접국인 스위스로 넘어간 위그노는 14-16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스위스를 경유해서 독일 혹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향했다.

 

이들은 베른/제네바/바젤/취리히/샤프하우젠에 거주했다. 특히 로잔은 위그노들을 형제로서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박해 기간동안 로잔에서는 400여 명의 광야교회 목사를 양성하였다. 베른은 위그노를 마차에 태워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투숙시켰다. 그 비용은 베른 당국이 감당하였다. 2만 명 정도 위그노가 스위스에 정착. 1689년엔 로잔 인구의 약 20%가 난민들이었다.

 

제네바: ‘개신교의 로마’. 개혁도시 제네바서 출판/면직/시계제조/금세공 산업을 일으키다.

 

제네바의 개신교 총회에서 개혁주의가 정식으로 채택(1615)되었다. 칼빈은 모국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1536-1538, 그리고 1541-1564까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실천했다. 칼빈의 교리와 그가 만든 종교적 규칙과 조직은 제네바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네바는 작은 도시지만, 문화와 경제의 중심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16세기 제네바의 출판은 전적으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출판은 제네바에서 산업으로 활짝 꽃을 피웠다. 면직 뿐만 아니라 시계제조와 금세공 산업도 제네바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p.101)

 

잉글랜드가 기술혁신을 주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도 시계산업이 점점 번창해 갔다. 시계산업은 쥐라산맥을 넘어 확산하여 갔다. 지금도 쥐라산맥 근처는 스위스 시계산업의 번창 지역이다. 이러한 시계산업의 엄청난 혁신에는 16세기 위그노전쟁을 피해서 스위스로 왔던 위그노의 후손 다니엘 장리차드의 공이 크다” (p.104, 위그노가 오늘날의 스위스를 만들었다)

 

6. 미국의 건국의 기둥이 되다: 죠이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위그노는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프랑스에서 직접 뉴잉글랜드(미국)로 가거나, 영국/네덜란드/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당시 미국은 독립 이전이라 뉴잉글랜드로 불렀다. 위그노는 집단으로 이주했고 반드시 목사를 대동하여 교회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실상, 162011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플리머스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에도 위그노들이 있었다.

 

1775년 발발한 독립전쟁 기간까지 미국에 정착한 위그노는 약 2만명 추산된다. 독립전쟁 전까지는 약 2,000-4,000명의 위그노가 미국에 정착했다. 사우스캘롤라이나 지역에 정착했던 위그노들은 밀농사 짓고, 포도를 재배하며 자신들의 거처 포트 캐롤라인(Fort Caroline)’ ()도 건축. 농사와 성 건축에 참여한 현지 인디언들 초청 식탁을 나누며 감사예배를 드렸다.

 

“’Jacksonville Historical Society’의 자료에 의하면, 그때가 1564630일이다. 거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Nous avons chante un psaume d’action de grace pour remercier Dieu”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감사의 시편으로 찬양을 드렸다). 이것은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이듬해 드린 추수감사 예배보다 57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것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드려진 최초의 추수감사 예배이다.” (pp.111-112)

 

“1624년부터 약 100년 동안 () 많은 위그노가 신대륙 미국을 향해 항해했다. 이들은 식민지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핍박을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 영국의 신민지를 자신의 조국으로 삼은 위그노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명망 있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 존 제이, 알렉산더 해밀턴, 피터 퍼네일, 삐에르 미뉴에뜨가 대표적이다.

 

존 제이는 미국 건국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미국 초대 연방대법원장, 2대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다. 미국 헌법의 초안 작성자로 참여하고, 1777년 미국 연방 대통령을 뽑는 대륙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미국 독립전쟁을 끝내기 위한 파리조약 체결에도 직접 참여했다.” (p.113, ‘위그노를 뿌리로’ -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등이 미국 건국의 기둥들이다)

 

나가는 말(결론); “우리가 21세기 위그노다. 위그노처럼 믿고, 위그노처럼 살자

 

앞에서 살펴본 위그노의 활약상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 밖에도 러시의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위그노의 진가(?)를 알아보고 위그노 난민을 적극 환영했다. 스웨덴에서 위그노는 광물 채굴기술을 제공하였고 스웨덴을 산업국가로 탈바꿈시킨 주역이 되었다. 위그노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에도 정착, 남아공을 포도주의 명품 생산지로 만들었다.

 

위그노를 통해서 유럽과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 그들은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을 박해하고 내쫓아버린 프랑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위그노의 국외 유출은 프랑스의 지식과 기술, 인력과 문화의 유출이 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대혁명이라는 뼈아픈 시간을 맞이해야만 했다. 반면에 그들을 받아들이고 협조한 나라와 도시는 놀라운 축복의 세례를 받았다. 디아스포라 위그노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디아스포라 연약이 성취되는 현장이다. 디아스포라 위그노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p.137, 이제사 우리는 깨닫는다. 칼빈의 나라 프랑스에 왜 개신교가 약한지를)

 

대한민국/교회도 위그노와 직·간접의 상관성은 있을까? “우리가 바로 위그노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 중에 위그노는 없다. 그러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거 상륙했다. 청교도 운동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제네바의 요한 칼빈과 위그노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한국교회도 간접적으로 위그노의 신앙과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 성원용 목사는 한국교회와 성도는 위그노의 영적 후손이라 할 수 있다”(p.139)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바로 이 시대에위그노이다.” 본서의 책 제목이 된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해외 흩어진 750만 재외 한인이 분명 위그노이다.

 

아브라함에게 디아스포라로의 부르심과 언약을 주시고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21세기의 위그노로 부르신 코리안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펼쳐지기를 기도하고 소망한다.“(p.141) 아멘 아멘 할렐루야!

 

<서평 후기>: “위그노처럼 믿고 위그노처럼 살자

 

솔직히 서평자는 이 책을 정독하기 전까지 위그노를 잘 몰랐다. 아니, 참으로 무지몽매했다. 이 작은 책(160페이지)를 서평을 쓰기 위해 여러 번 읽으며 위그노를 더욱더 사랑하며 흠모하게 되었다.

 

오늘의 나를 포함한 해외 모든 선교사와 모든 한인교회와 성도들은 분명코 오늘의 위그노들이다. 이 책을 모든 동료 해외 선교사들께 선물하고 싶다. 디아스포라 한인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 강추하고 싶다. “위그노처럼 믿고 위그노처럼 살자”. 할렐루야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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