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용 목사 저, “위그노처럼”… 배안호 박사 서평“본 서평을 읽는 독자는 <우리가 위그노다> 서평도 꼭 읽으시기 바란다”
들어가는 말(서론):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부제)
“위그노들은 예배에 생명을 걸었다!”. “한국교회의 미래, 위그노에게 답이 있다”
역사(歷史)를 잊은 민족이나 개인은 미래가 없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 ‘주여! 이 시대의 ‘위그노’로 살게 하소서!’
<우리가 위그노다>에서 위그노가 근대 세계사(世界史)를 바꾸었음을 확인하였다. 16~18세기 위그노들(프랑스 개신교인들)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독일 부국강병의 원천이 되었고, 네덜란드를 업그레이드했으며, 스위스 시계산업을 꽃피웠고 미국 건국의 기둥들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위그노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서평자는 역사를 전공한 자로서 너무나 부끄러웠다. <우리가 위그노다> 서평을 쓰면서 비로소 이런 역사적 실상을 알게 되었다.
본서 <위그노처럼>(성원용, 국민북스, 2023),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본서의 부제)
예수쟁이는 반드시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와 성도들도 위그노의 ‘영적 후손’이기 때문이다.
본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28년째 사역하고 있는 성원용 목사가 ‘피와 땀과 기도로 쓴’ 생생한 리포터이다.
성원용 목사는 장로교신학대학원(Th.B./ M.Div)과 파리 개신교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미드웨스트 대학원에서 ‘리더십’으로 박사학위(D.L.)를 받았다, 현재 예장(통합) 파송선교사로 파리 선한장로교회 담임이며 위그노 연구원 원장과 한불 선교협력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으며, 한국기독교문화를 통해 등단한 수필가이다. <본질을 붙들면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위그노다> 등 여러 저서들이 있다.
서평자는 저자가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에서 제시하는 10개의 교훈을 중심으로 책의 핵심내용을 요약하면서 서평 쓰기를 진행할 것이다
1. 용기를 내라. 개혁은 입술의 구호(口號)가 아닌 ‘삶의 예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서평자는 최근에 일어난 한국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보면서 큰 탄식을 하고 있다. 지식인 중에 비겁한 자, 겁쟁이, 옹졸한 자들이 즐비하다. 개신교 안에도 ‘VIP’들의 추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입만 벌리면 개혁, 개혁을 들먹인다. 개혁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기득권과 생명을 내놓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국의 위기이다. 개혁의 목소리들은 요란하지만 묵묵히 선한 모델을 보여주는 교수, 목사, 선교사는 잘 안 보인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Tel pere tel fils): 기욤 브리소네(1445-1514) 아들 브리소네(1470-1534) → 프랑스 개혁교회를 시작한 용감한 두 부자(父子)의 개혁운동!
프랑스 파리 생 제르맹 테 프레교회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의 부속 성당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 수도원의 원장들. 아버지 브리소네는 당대의 석학이요 큰 재산가. 그는 용기 있게 교회 내부의 부패와 맞서 싸우는데 인생을 바쳤다. 당시 4명 추기경을 불러 교황이 권력을 남용한 리스트를 공개했다.
이 일로 그는 직위와 부(富)를 모두 잃었다. 그의 아들 브리소네 또한 당대 최고의 석학(자크 르페브르 테타플)의 가르침을 받아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교회 사제들을 비판하며 방탕한 신부들을 내어 쫓고 일반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 아름답다.
“그의 용기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개혁 그룹이 만들어졌다. 테타플의 제자들, 국왕 프랑스아 1세의 누이와 어머니를 비롯한 왕의 측근들, 왕궁에 속한 시인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인문주의를 논하며 시편 송을 불렀다. 그들이 당시 벌였던 것들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교회를 개혁하고 말씀으로 바로 세우기 위한 거룩한 만남이 시작됐던 것이다. 역사는 작은 만남에서 우연처럼 시작되는 법이다”(p.69)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말한다. 먼저 ‘삶의 예전’, 곧 삶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본질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일이다. 급진적인 일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위그노들은 세계 역사를 바꾼 촉매자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개혁자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역사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 했던 것이다. (<우리가 위그노다> 책의 저의 서평을 꼭 읽으세요).
2. 고난을 감당하라. ‘망치와 모르’ → ‘아무리 망치질을 할지라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모진 박해를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단 두 가지다. ‘인내’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위그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은 위그노-십자가/분리형 강대상/분리형 성찬/ ‘망치와 모루’다.
이 4가지가 102년간의 광야교회 모진 박해를 통과하게 하였다. 이 중에서 ‘망치와 모루’(mar- teau et enclume)는 위그노들의 박해 실상과 그들이 견뎠던 정신을 잘 상징한다.
피로 물든 세느강 →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세워진 곳에서 수많은 위그노들의 시신발견.
망치와 모루는 대장장이가 사용하는 연장이다. 불에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사정없이 두드리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낸다. 태생이 개신교도였던 앙리 4세는 프랑스 전역을 정복한 후, 마지막 정복지인 낭트에서 개신교들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래서 ‘낭트칙령’(1598)이다). 프랑스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합법화한 사건이었다.
87년간 위그노들은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14세(앙리 4세의 손자)는 ‘풍텐블로 칙령’(1685)선포로 또다시 위그노는 무려 102년간 모진 ‘망치질 박해’를 받았다.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풍텐블로에서 낭트칙령을 폐지하는 풍텐블로 칙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프랑스 대혁명 직전 루이 16세가 베르사유 관용 칙령을 선포한 1787년까지 102년 동안 위그노들은 길고 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프랑스 개신교의 광야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짧은 자유는 길고 긴 고난의 날들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p.101, 프랑스에서의 길고 긴 신교와 구교 간에 야기된 피의 전쟁역사!!)
우리는 여기서 ‘좋으신 하나님’께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무슨 이유로 프랑스의 개신교들(위그노들)에게 이런 모진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눈물이 절로 흐른다. 저자(성원용)도 여기서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진력했던 위그노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그늘의 고난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끝나지 않는 나의 질문이다. 아마도 나 역시 평생 이 질문의 답을 찾으며 살 것이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그분으로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실히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p.101)
3. 저항하라(Resister): 위그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단어
루이 14세 낭트칙령 폐지(1685) 후 개신교 목사/설교자들은 15일 안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루이 16세의 베르사유 관용칙령(1787) 선포 때까지 102년은 프랑스 개신교회의 ‘광야시대’.
위그노들의 선택은 세 가지뿐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프랑스를 떠나거나(약 25만 명), 급진적 저항(카미자르)과 비폭력 저항이었다.
프랑스 땅에 남은 위그노들에게 그 어디에도 안전한 은신처는 없었다. 여인들은 종신 감옥에 갇혔고 남자들은 노예선에 끌려갔다. 그러나 위그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비밀리에 깊은 산 동굴과 계곡에서 이동식 강대상과 성찬을 나누며 예배를 드렸다.
RESISTER(저항하라)! 마리 뒤랑(Marie Durand, 1711-1776), 위그노의 상징적 인물!
위그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단어는 “저항하라”’(레지스테 Resister). 프랑스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위그노의 상징 인물이요 신앙의 영웅은 마리 뒤랑(Marie Durand)! 한국교회의 주기철. 손양원 목사 같은 인물이다.
뒤랑은 그녀의 온 가족과 함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며 38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녀의 집에서 광야교회 예배가 드려졌고 그 예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체포당하였다. 광야교회 목사였던 오빠 삐에르 뒤랑은 32세 나이에 공개처형 되었고 그녀의 부모도 모두 순교하였다.
“19세의 소녀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57세에 자유인이 된 마리 뒤랑은 고향으로 돌아가 8년 생활하다가 1776년 7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삶 자체가 순교자 적이었다. 오랜 고난 속에서도 양심의 자유를 위해, 진리를 위해 왕권의 불관용에 대항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그녀의 비폭력 저항의 삶은 지금도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위그노들의 가슴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p.118)
4.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라; 25만영 위그노 디아스포라 → ‘세계 역사의 변곡점에 서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하물며 국가와 종교의 권력에 의해 정처 없이 망명하여 해외에서 생활하는 위그노의 형편과 처지는 어떠했을 것인가? 위그노의 망명은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돌로매 대학살 사건(1572.8.24)으로 촉발되었다.
당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인구의 12%를 넘어서고 있었다. 위그노는 200만 정도였다. 루이 14세의 풍텐불로 칙령 이후 박해는 가속화되자 25만 정도의 위그노가 고국을 떠났다. 영국/독일/네덜란드/스위스/미국/남아공 등으로…
5. 개혁자로 서라: “즉각적으로 신실하게”(Prompte et Sincere)
프랑스는 종교개혁자인 존 칼뱅의 나라다. 그는 파리에서 120km 떨어진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칼뱅의 경건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그의 개혁 정신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칼뱅의 전 생애를 살펴보면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의 하나님’을 확인하게 된다. 위그노와 칼뱅의 삶과 사역을 20년 넘게 탐구한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돌아보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다. 이미 칼뱅은 섭리 가운데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의 우발성과 함께 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하나님 섭리의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pp.154-55,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우발성’)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기욤 파렐과 칼뱅과의 만남이 대표적인 하나님의 섭리 사건이었다. 칼뱅보다 20살 연상인 기욤은 자신의 종교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휴식과 공부를 저주하기를 바라오”라고.
제네바 시의회에서도 칼뱅에게 다시 초청장을 보냈다(1540년 10월 13일). 아직 주저하고 있던 칼뱅은 마침내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면서 기욤 파렐에게 보낸 편지; “나 자신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알기에 나의 심장을 도려내어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그는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 종교개혁을 완수하였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Prompte et Sincere)는 칼뱅의 헌신을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다. 도려낸 심장을 손에 든 ‘칼뱅의 순종의 문장(紋章)’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개혁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이었을까? 그 길을 나서기까지 망설이고 또 망설이지만 일단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서는 순간이면 즉각적이고 신실하게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주님께 드리는 삶, 그것이 개혁자의 삶이고 모든 사역자들의 삶이다” (pp.157-58)
6. 토레랑스(tolerance)하라. “토레랑스가 없어서 톨레랑스를 외친다”
오늘날 프랑스 하면 우리는 토레랑스를 먼저 떠올린다. 왜? 무슨 역사적 근거가 있었을까? 역시 16~18세기의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의 혹독한 핍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래 16세기 유럽과 프랑스는 신교와 구교, 국가와 국가, 옛 질서와 새 질서 간의 대립과 충돌의 소용돌이 쳤다. 프랑스는 국가 권력으로 위그노를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핍박했다. 루이 16세의 베르사유 관용칙령(1787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길고 긴 기간 위그노들은 자신의 신앙과 신념 때문에 톨레랑스(관용) 없는 박해를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이런 배경에서 칼뱅은 1532년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했다.
앙리 4세의 낭트칙령(1598, 개신교 예배의 자유 허락)은 톨레랑스가 최초로 규칙이 되고 법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낭트는 과거 아프리카 노예들이 도착하여 프랑스와 유럽으로 팔려가는 노예 시장터였던 곳.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는 할아버지가 선포했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퐁텐블로 칙령(1685)으로 다시 톨레랑스 없는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톨레랑스의 실종은 국가와 백성의 삶을 피폐시켰다.
베르사유 칙령(1787년): ‘톨레랑스 칙령’(L’edit de tolerance), → 프랑스 대혁명(1789)
관용/토레랑스는 프랑스의 법과 보편적인 가치. 프랑스는 이처럼 2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아픔을 겪은 관용’을 배우게 된 것이다.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듯’(Freedom is not Free) 진정한 관용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후에 프랑스는 관용의 나라/사회가 된 것이다.
“토레랑스 칙령이 선포된 지 2년 후인 1789년 7월 14일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톨레랑스 없던 왕권과 가톨릭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이었다. 혁명 이후 19세기에 개신교회는 회복과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p.167)
7. 5개의 솔라(Sola)를 기억하라: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우리가 익혀 알고 있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5개 기둥, 5대 원리이다. 루터는 오직 성경/믿음/은혜를 강조했고, 칼뱅은 여기에 오직 그리스도/하나님께 영광을 더했다. 여기서 성경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종교개혁의 오리지널 자료다. 다른 것은 보조 자료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시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정도시(神政都市)를 만들려 했다. 28년간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사명을 완수했다. 칼뱅의 영향을 받은 제네바 시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근면/성실/정직하게 일하며 ‘직업과 소명설’에 따라 살았다. 서구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위그노들이 도착한 나라들마다 놀라운 발전과 번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프랑스의 위그노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나라와 도시마다 산업이 발전하고, 번영을 이루며 역사의 전환을 이룬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칼뱅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아갔다. 그들 모두가 사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명자들이 모인 성읍이 번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90)
8. 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을 추구하라
개신교의 3가지 특수성: 다수성(pluralite), 자유(Liberte), 단순성(simplicite)
다수성(pluralite) : 다양성은 개신교의 특징이다. 개신교의 태생부터 다수(교파)로 각국에서 존재하였다. 중앙 집권 구조가 없다. 서로 비판 견제하는 기능을 갖는다. 공동의 가치를 위해 서로 대회/조정/조화하는 가운데 민주적인 능력을 갖춘다. 시대/장소/상황 변화에 유연하고 신속하게 적응한다.
그러나 단점으로는 지나친 분열과 혼합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로랑 가느방 (파리 개신교신학교) 교수는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집에 다양한 가족이 사는 것과 같고, 개신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 여러 집에 흩어져 사는 것과 같다”(pp.196-97)
자유(liberte) : ‘복음’과 ‘자유’는 개신교의 심벌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복음의 발견이다. 복음이 주는 양심의 자유(요 8:32, 8:36)라는 선물을 되찾는 운동(갈 5:1)이다. 가톨릭의 7성례전(聖禮典)은 양심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제왕적 교회구조와 계급체계가 교황제도다. 성직자들의 ‘호위무사가 7성례전’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예수님이 친히 만들어 주신 ‘세례와 성찬’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이며 평등한 제사장들이다.
단순성(simplicite) : 개신교의 잠언과 같은 단어다. 성직자의 복장과 교회의 건물은 단순해야 한다.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화려한 옷을 보라! 가톨릭교회의 웅장함을 보라!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닌 ‘예배당’일 뿐이다.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스페인 바로셀로나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성당). 화려함의 극치다. 어떤 목사, 선교사는 그 성당을 구경하고 왔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호 통재라!) 교회에는 ‘강대상과 성찬 상’만 있으면 족하다. 서평자는 지난 50여 년 한국/스코틀랜드/탄자니아/파라과이/영국 등의 다양한 교회를 섬기며 설교하고 있다. 단순한 교회당, 단순한 예배가 생명이다.
“나는 단순성이야말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정신이라고 믿는다. 어느덧 한국교회는 단순한 교회가 아니라 복잡한 교회가 되었다. 단순한 예배당보다는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웅장한 예배당을 자랑한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수많은 성도 수보다, 화려한 예배당보다 보다, 풍부한 재정 보다, 탁월한 프로그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순한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이다” (p.211)
9.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 날마다 신앙과 교회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세상의 희망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그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엡 1:23). 교회가 바로 설 때 세상은 구원의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교회가 무너지면 세상도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진다.
종교개혁은 신양 개혁(루터)이요, 교회의 개혁(칼빈) → 민주주의 기초가 되다
루터는 교회 안에서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칼뱅은 교회 밖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워나갔다. 그것이 프랑스와 스위스에 세워진 ‘개혁교회’였다. 칼뱅은 종교개혁의 기본 원리인 ‘만인제사장주의’를 기초로 교회를 세웠다. 목사/장로/집사/교사(엡 4:11) 4개의 직제를 근거로 장로교회의 4중직제 체제를 만들었다. 이런 개혁교회 원리로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평등한 논의 구조는 훗날 민주주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서구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p.215)
사실상 대한민국의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상해 임시정부 최초의 헌법인 임시헌장(1-2조)에 장로교회 헌법에 상응하는 공화제와 대의민주주의가 명시되었다. 당시 상해 임정수립에 개신교 애국자들이 대거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개신교회에서는 교회를 개척하여 크게 부흥시킨 일부 목사들은 교회운영에서 ‘작은 교황’이 되기도 함을 목도한다.
10. 주 안에서 행복하라. → 모든 예수쟁이는 행복한 궁전의 삶의 주인공이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이 질문 앞에 상당수의 예수쟁이는 주저한다. 우리가 이런 질문이 들어있는 전도지를 나누며 전도하는 “당신은 지금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되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행복의 이르는 길을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은 팔복강화(八福講話)다. 진정한 행복은 복음 안에 있다. 예수님 안에 있다. 성령충만 안에 있다.
“위그노는 행복했을까? 아니면 불행했을까?” “위그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역설적 행복의 길을 따라갔다. 실제 그들은 산상수훈의 팔복을 상상하며 살았다. 위그노의 십자가는 팔복을 상징하는 8개의 봉우리가 그려져 있다. 팔복의 삶을 이 땅에서 이루려는 그들의 의지가 그 속에 깃들어 있다. 위그노의 성지인 남 프랑스에 있는 광야 박물관의 마지막 방 벽에 팔복 중 끝에 기록된 행복이 기록되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삶’이야 말로 위그노의 삶이었다. 그것이 그들 역사의 여정이었다. '복을 받으리라!'야말로 그들이 지나온 역사의 결론이었다” (p.221, 서평자는 로마의 카타콤을 방문할 때마다 팔복의 영성을 생각하였다)
마무리(결론): “우리가 21세기 디아스포라 위그노다’. → 아버지 위그노처럼 살게 하소서!
“디아스포라 위그노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장엄한 역사다. 나는 디아스포라 위그노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과 믿음을 공유한 나 자신이 21세기 디아스포라 위그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원용, 『우리가 위그노다』 뒷표지)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을 서평을 마감하면서 나 자신이 위그노임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위그노처럼 살아야 한다. 용기를 내라/고난을 감당하라/저항하라/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라/개혁자로 살라/톨레랑스하라/5개의 솔라(Sola)를 기억하라/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을 추구하라/교회를 교회되게 하라/주안에서 행복하라. 먼저 나부터 이렇게 살 것이다. 오늘부터!
“나도 위그노처럼 살고 싶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이, 한국교회 성도들이 위그노처럼 살기 바란다. 하나님은 운명처럼 나를 파리로 보내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위그노의 삶과 신앙을 한국교회에 알리라는 그분의 부르심과 뜻이었다. 이 책은 부르심에 응답한 나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역사학자는 아니다. 그래서 발로 썼다. 가슴으로 썼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가 위그노의 흔적이 펄펄하게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에 발품 팔러 오기를 기대한다. 이 글을 가슴으로 읽고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조용하지만 지속적이고 힘 있는 개혁을 일으키기 바란다. ‘위그노처럼’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그노처럼’ 사는 것이다”(pp.247-48). 아멘 아멘!
[서평후기] 서평자는 동일한 저자의 책 3권을 연달아서 서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명색이 필자는 역사를 전공하였지만 얼마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지를 깨달았다. 이 책은 위그노의 ‘신앙적 후손인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께 소개하고 싶다. 해외에 사는 750만 한인 디아스포라 가운데 40%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이 먼저 이 책 읽기를 간절히 원한다. 나의 서평 쓰기의 1차 독자는 전세계 선교현장의 동료 선교사들이다. 특히 열악한 선교현장의 선교사들에게 마음으로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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