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서론): ‘대구는 한국의 제2의 예루살렘이요 성경벨트이다’
“대구 성읍은 ‘다윗의 망대가 있는 예루살렘 같다’”(Henry M. Breun)
대구와 경주는 ‘불교 도시’요 대한민국 제3,4의 도시다. “이곳에 언제 어떻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까?” “대구 동산병원과 계명대학교, 신명여고는 어떻게 세워졌을까?” “왜 대구를 ‘청라 언덕’이라 부를까? “‘대구 첫 사과나무는 누가 심었을까?” “한국 최초의 피아노는 어떻게 대구로 들어왔을까?” “한국 최초의 마취과 의사?” 이런 질문들의 명쾌한 답을 알아보자.
‘동무 생각, ‘오빠 생각’.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뻐꾹 뻐꾹 뻐국새 숲에서 울제/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등 친근한 박태준 선생의 주옥 동요(童謠)들은 3.1 만세운동 이후 청라언덕에서 비롯되었다.
경북 대구의 근현대사는 영미의 청교도들 신앙,문화,교육,개화사상이 집약되어 이루어진 근대 역사문화의 출발지. ‘청라(靑羅)’는 ‘푸른 담쟁이덩굴’이 덥힌 대구읍성 이름이다.
대구 ‘청라언덕’은 125년 전 선교사 주택이었다. 당시 조선말의 대구 읍성은 소음, 연기냄새, 개 짖는 소리, 방망이 소리, 무당 굿하는 소리, 인분 냄새, 굴뚝에서 내뿜는 매운 연기로 가득했다.
“어느 저녁 무렵 아담스, 부르언, 존슨 세 선교사가 지금의 구 동산병원이 있는 언덕에 올라가서 성안의 냄새와 소음과 연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공기도 좋고 전망도 좋은 이곳을 일부 매입하기로 했다. (p.31. 청라언덕은 현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 바로 옆에 있다. 대구 근대역사문화 관광 명소이다)
<사문진 나루터에서 청라언덕까지, 사청 순례길에 남겨진 역사와 문화>(전재규.황봉환, 우리시대, 2024)는 작은 책(84페이지)이지만 묵직한 대구 경북 기독교 역사문화연구서다.
대한민국 기독교 근대역사문화들을 발굴하여 보존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사단법인 한국순례길’이 2023년 5월 26일 출범하였다.
본서는 대구, 경북 제2길, “사문진 나루터에서 청라언덕까지”란 주제로 대구 기독교 유적진들의 역사적 토대와 그 발전과정을 연구한 책이다. 전재규, 황봉환 교수(저자들) 노고가 돋보이는 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대, 경 기독교 역사문화 연구서이다.
전재규 교수는 의학자이며 대구 3.1운동과 대구 역사 정립 운동과 각종 문화사업 재연행사 등을 이끌어왔다.
한국 최초의 마취과 의사, 계명대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장 재임 중 대구 3.1운동 정체성 확립을 위한 책을 출간했다. 현재는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및 대신대학교 명예총장으로서 각종 사회 공헌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백암 전재규 박사의 생애와 사상> - 청라정신으로 가는 길(황봉환. 박창식. 김병희, 휴먼앤북스, 2023).
황봉환 교수는 1981년 총신대와 84년 총신대 신대원을 거쳐 영국 에버딘대학과 웨일즈대학을 졸업했다.
2001~2003년 총신대 신대원 겸임교수, 2003년 대신대학교 신학과로 부임한 황 교수는 신학대학원장 실천처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부총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과 학교 발전에 헌신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는 울산 대암교회(배광식 목사) 협동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전체 3장의 제목을 따라서 서평자는 ‘사문진 나루터와 대구 기독교 역사’, ‘청라언덕’: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복음전도’: 기독교 교육의 태동과 교육 선교의 현장’을 들여다보며 서평한다.
1. 사문진 나루터와 대구 기독교 역사: ‘사문진 나루터에서 청라언덕까지’
낙동강은 백두대간의 중심 위치인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은 황지연 못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봉화/영주/예천/안동/상주/구미/대구/밀양/삼량진/김해/부산 을숙도를 흘러 남해로 이어진다. ‘사문진’ 나루터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의 관문 나루였다.
왜 ‘사문진’인가 명칭의 기원은 강가에 모래(沙)가 있고, 포구를 통해 소금이나 목재가 들어오고, 이 지역의 토산물이 다른 지방으로 가는 문(門) 포구(津)라 하여 사문진(沙門津)이 유력하다.
한국최초의 피아노(‘귀신통’)는 1900년, 대구/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도착
사문진은 낙동강(6,525km) 상류와 하류를 잇는 무역선이 드나들던 이름난 포구. 일제시대는 무역창고를 왜물고(倭物庫) 또는 화원창(花園倉)으로 유명하였다.
이 사문진을 통해서 1900년 3월 26일, 대구 선교부로 부임하였던, 사이드보탐(Richard H. Sidebotham, 1874-1908)은 한국 최초로 피아노를 부산에서 낙동강에서 사문진까지 운반하였다.
사문진에서 대구읍성의 선교사 주택(구 대구제일교회)까지 16km 거리를 짐꾼 20여 명이 3일간 상여처럼 메어 옮겼다. 당시 대구읍성 사람들은 빈 나무통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겨, 귀신이 내는 소리, ‘귀신통’이러 불렀다.
대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교사: 1893년,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경북 대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교사는 누구였을까?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4년 간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하던 중에 1893년 4월 22일에 서경조 전도사(John Ross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신약성경 번역에 참여했던 서상륜의 친동생, 장로교 초대 목사)와 함께 대구에 도착했다. 1893년 봄부터 대구선교의 문이 열린 것이다.
윌리엄 베어드는 3년 후에 대구읍성 남문근처 선교부지를 매입(1896년 1월)했다. 대구 약전골목 내에 있는 구 대구제일교회부지. 대구의 최초의 교회당이 된 것이다.
1901년에 5월엔 미국 북장로교 소속인 우드 부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와 아내인 에디스 파커(Edith M. Paker)가 미국서 보낸 피아노 한 대가 사문진을 통해 대구에 들어왔다. 대구에 파송 된 최초의 의료선교사 부부였다.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이후 파커 선교사는 1907년부터 신영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을 때 그의 피아노를 신명여학교에 기증했다. 당시 대구서 활동하던 선교사 주택 건축을 위해 목재를 낙동강을 통해 운반했다.
2. 청라언덕: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대구 제일교회/동산병원/계성(啓聖)학교/신명여학교
1900년 전후에 대구에 도착한 미국 선교사들은 대구와 경북에 근대문화가 꽃피게 하였다. 기독교의 3대 중심 사역은 복음전도(Preaching), 교육(Teaching), 치유사역(Healing ministry)이다(마9:35). 잘 준비된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한국인 사랑으로 교회/학교/병원/나환자 치료소가 대구 읍성에 세워졌다.
대구에 2번째 입성한 선교사는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였다(1897년 11월 1일). 놀랍게도 그의 누님(Annie I. Baird)이 윌리엄 베어드와 결혼하여 처남매부 지간.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에 도착할 때, 임신 8개월 만삭인 부인(넬리 딕)과 딕 선교사를 돌볼 간호사 마리아 L. 체이스 선교사가 함께 도착하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1년 전에 서울로 이동해 간 베어드 선교사가 살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대구의 최초의 ‘야소 교회’, 대구제일교회가 세워졌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곧바로 학교를 조직하여 어른과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대남소학교’는 경상북도의 최초의 소학교요 근대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2.1. ‘남문안교회’설립과 ‘대남소학교’와 여자부 신명여자소학교 개교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에 도착한 5년째(1902년)부터 경북 각처 교회에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즈음에 학생 수가 900명이 이르게 되었고 대구와 경산, 청도/영천/청송까지 선교지역을 확대하여 교회와 소학교들이 경상북도 일원에 설립되었다.
“1902년에 아담스 선교사는 경북 각처 교회에 400원씩 보조하여 소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중략) 지금도 대구, 경산, 청도에는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120년이 넘는 교회들이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되고있다” (pp.28, 29)
2.2. 의료선교를 통한 기독교 유산들: 계명대학교/동산병원 개원(1899년)
의료선교사 존슨(Woodbridge O. Johnson) 부부 선교사는 1897년 12월 22일에 부산항 도착하여 성탄절에 도착하의 의였다. 존슨 선교사는 먼저 조용한 사찰(파계사)에서 한국어 교사로부터 2년간 언어공부에 집중. 1899년 미국서 보내온 의약품으로 “미국약방”이란 간판을 걸고 진료시작했다. 경북 최초의 의료기관 ‘제중원’. 오늘날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그 당시 한 선교사의 기록이 생생하다.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대구읍성을 바라보고 이 불모지 언덕을 매입하면서 브루언 선교사는 이렇게 적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부지를 위해서 예배해 놓은 땅이다. 저녁때 언덕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다윗이 압살롬과 싸워 이긴 후 세운 다윗의 망대와 같은 성문 꼭대기를 제외하고는 연기가 자욱한 시가지를 신비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 (p.31, 당시 대구 성읍의 생활환경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11년에 아치볼드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는 존슨 선교사의 뒤를 제중원(동산병원) 원장으로 사역을 시작. 그는 한센병 치료를 위한 ‘애락원’을 크게 발전시켰다. 아치볼드는 안식년 중에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며 병원건축을 위한 거금의 기금을 마련했다. 영국과 미국교회의 선교기금으로 대구에 근대식 병원이 설립되었다.
7년 후(1918) 플레처는 밀려드는 환자들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환자들을 돌보느라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어 급성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 휴양하며 건강회복 후 다시 2년 반 후(1920년) 대구로 돌아왔다. 영국과 미국의 통 큰 선교후원을 받아왔던 것이다.
2.3. 대구동산기독병원 전도회 조직(1921년) → 20년간 147개 지역교회 설립
병원전도회(Hospital Preaching Society)는 병원 전체 직원 26명 전도회 조직, 봉급의 1% 전도회 헌금으로 운영하였다.
분명한 목적: 첫째, 모든 환자에게 복음 전할 것. 둘째, 가능한 많은 환자를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기 셋째, 새신자가 교회에 정착하게 하는 것.
마펫 선교사는 1929년에 대구의료원에 18,000명 환자가 치료받았으며 친지.친척들까지 3만 명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복음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2.4 마포삼열/하워드 마펫(Howard F. Moffett)선교사: 평양에서 태어난 ‘한국인’, 동산기독병원/대구애락원/동산 간호학교 → 계명대학교 동산기독병원
마펫 선교사는 1948년 해방되던 해 12월에 대구동산병원장에 취임. 전쟁 중에 미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한국에 다시 오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동산기독병원에 돌아와 6.25전쟁 고아 20만 명, 대구시내 20곳, 근교에 29곳의 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 선명회(World Vision)의 로버트 피어스(Robert Willard Pierce)로부터 5만 달러, 주한미군 대한원조처 도움받아 3층 건물 60병상 병원건축(1953.10월)
그는 대구에서 선진 의료기술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서평자는 하워드 마펫 선교사가 마포삼열의 둘째 아들이었음을 솔직히 모르고 있었다. 그는 1917년 평양에서 출생한 한국인(?)임이 분명하다.
그의 부친은 마포삼열 곧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 1901년에 신학반(평양장로교신학교)설립자요 초대학장이었다. 그는 평양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휫튼대학과 노스웨스턴 의대졸업. 미 해군 입대 의무장교로 3년간 복무 후 대구 동산기독병원에 취임하였다.
한국전쟁 시 미공군 군의관으로 한국근무 당시 그의 고향 평양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지를 물었을 때 마 목사를 아는지 질문을 받았고 (중략) 아버지를 알고 모든 평양의 선교사들에 관해 듣고 싶은 사람들이 저희를 뒤따랐습니다” (p.51)고 하였다. 대를 이어서 한국선교에 충성한 마펫 선교사 가문이 존경스럽다.
계명대부속 동산기독병원은 불교의 고장 경주에 경주기독병원 설립하여 진료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대구 동산기독병원에는 많은 외국인 의사들 간호사들, 한국인 의사들도 국내외에서 수학하고 함께 일하였다. 전재규 박사는 동산병원에 일생을 바치며 미국병원에서 의사 활동 중에 마펫 원장의 초청으로 귀국. 한국 최초의 마취과 의사로 재직, 한국호스피스협회 창립하며 회장과 초대 이사장으로 섬겼다.
나가는 말(결론): ‘한국의 제2예루살렘’, 대구는 청라 정신’이 꽃 피운 곳
“(청교도)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으로…사역이 시작되고 꽃이 핀, 청라언덕(대구)”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웠다. 하지만 현재 평양은 공산당 치하에서 교회도 신학교도 없다. 대구는 경상도 지방의 모체로 교회와 학교, 병원 등 기독교 사회사업의 중심이 되었다.
한국의 ‘제2의 예루살렘’은 대구다. 청라언덕과 그 주변에는 영미 청교도 신앙.문화.교육.개화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청라정신’이 꽃핀 곳이다. 청교도 전통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평양과 대구를 거점으로 한국장로교의 기초를 놓았다.
미국은 청교도(puritan)들이 세운 나라다. 청교도의 뿌리는 영국이다. 청교도는 성경대로 우직하게 사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들’이란 뜻이다. 평양과 대구에 들어온 소수의 엘리트 선교사들은 장로교 청교도들이었다. 성경관과 교회관이 확실한 분들이 기초를 든든히 놓았다. 그래서 대구는 기독교문화/성경 벨트가 된 것이다.
대구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제일교회/동산병원/애락원을 설립하였다. 대구와 경산에서는 6.25 전쟁고아 소년들을 위한 메노나이트 실업학교을 세우며 전쟁의 상처를 싸매며 지도자 양성에 앞장 섰다. 수 많은 고아가 위대한 믿음의 용사로 성장하였다.
‘청라 정신’은 무엇인가? 미국의 ‘아이비(청라) 대학교’(Ivy League University)
미국 동부의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대학 등 8개 대학은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이라 부른다. 이들 대학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목회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대학들이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오랜 세월 영국의 국가교회 개혁을 투쟁하는 중에 1620년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로 미국 동부해안에 도착하여 먼저 교회와 대학을 세웠다. 영국국가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서 성경대로 믿고 사는 나라, ‘아름다운 나라’(美國)를 세웠던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눅 5:38)가 청라 정신이다.
대구 사과는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한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의료선교사로 1897년에 대구에 들어올 때 갖고 온 사과나무가 대구가 사과고장이 되었다(현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선교박물관 옆 뜰에서 자라고 있다)
서평 후기: 서평자는 경북 성주(星州)서 태어날 때, 멀리 낙동강 전투 포성소 리를 들었다. 대구서 중,고 6년을 공부할 때 ‘나는 서구 문명의 상징인 교회를 대한민국에서 없게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하였다. 20세에 복음을 듣고 예수쟁이가 되었다. 청라정신으로 탄자니아와/파라과이/영국에서 선교사로 섬기기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와종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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