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언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세계 역사의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는 가톨릭의 구원론을 거부한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구원론이 있었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은 새로운 교회인 개신교회를 탄생시킨 근원이었고, 이 개신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수많은 개신교 국가들도 탄생했다.
개신교회를 자유의 종교라고 지칭하는 뿌리도 바로 이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상징되는 구원론이었다.
이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은 긴 세월 동안 개신교회를 상징하는 개념이었고, 이 구원론은 20세기에는 바르트(K. Barth)와 불트만(R. Bultmann) 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이 구원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나타났다.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가 등장하면서 세계 신학계는 구원론에 심각한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 신학계의 혼란은 점차 교회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 글은 이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신학 이론을 평가하고, 온전한 구원론을 확립하기 위한 글이다.
최근에는 새 관점을 넘어서는 더 새로운 관점(newer perspective)이 등장했는데 이 더 새로운 관점도 함께 평가하면서, 온전한 구원론이 어떤 것인지 찾아갈 것이다. Ⅰ.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에 대한 오늘의 신학적 도전
종교개혁 시대의 표어인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최근에 와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 도전의 중심에는 영국에서 주로 발전된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영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새 관점 학파는 샌더스(E. P. Sanders), 던(J. D. G. Dunn), 라이트(N. T. Wright) 같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신학이다.
이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루터(M. Luther)의 가르침에 강력하게 도전했다. 새 관점 학파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시작은 오직 은혜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나은 백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선택받을만한 의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계약의 백성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면 계약을 지키는 행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계약을 지키는 행위가 없으면 계약의 백성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오직 은혜로 계약의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계약의 백성으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계약 안에 있는 행위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새 관점 학파는 계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표어 속에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 녹아 있다. 계약적 율법주의란 칭의(justification)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최종 구원에 이르는 길은 계약을 지키는 행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에서의 구원파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싸구려 구원론 같은 것을 거부하는 개념이다. 루터의 칭의론에서 시작되는 개신교의 구원론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새 관점 학파에 의하면 누구도 구원을 이루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우리는 푯대를 향해 끊임없이 뛰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까 두려워하며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칭의의 사건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모든 것이 오직 은혜가 아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가르친 루터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다.
던이나 라이트에 의하면 율법을 반대한 바울의 반대는 율법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율법 폐기론자들은 바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바울의 글들을 역사적 맥락을 떠난 초시간적 상황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당시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바울의 글들을 읽을 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
바울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할례나 안식일법, 정결법 같은 유대 율법이 규정하는 법을 이방인들이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할례나 안식일법, 정결법 같은 규례를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증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법을 지키는 것을 선민으로서의 자신들의 자랑이라고 믿었고, 또한 이 법을 지키는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믿고 있었다. 던이나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이 반대한 율법은 바로 이와 같은 율법의 규례를 이방인들이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바울이 무엇을 반대했는지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바울이 율법 자체를 반대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 던과 라이트의 기본적 관점이다.
이 오해는 이미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 나타났고, 루터에 의존하는 개신교 신학의 구원론이 이와 같은 잘못된 관점을 계승한 구원론이다.
개신교 구원론이 이와 같은 잘못된 구원론을 계승했기 때문에, 값싼 은혜가 야기할 수 있는 윤리와 실천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생겨나는 대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새 관점 학파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다. 개신교가 끊임없이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격하시키고 비아냥거렸는데 이는 유대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오해가 유대인 박해로 나타났고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비극도 이 오해와 무관한 사건이 아니었다.
새 관점 학파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 오해를 극복하는 기념비적인 저술이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 1977)라는 저서이다.
샌더스의 이 책은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도록 만드는 위대한 저술이다. 새 관점 학파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오늘도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유대교가 율법주의 종교라는 무식한 말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샌더스에 의하면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고 은혜의 종교이다. 샌더스는 제2성전기의 유대교 문서를 철저히 분석한 이후 유대교는 결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고 은혜의 종교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2성전기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고향으로 귀환한 이후, 성전을 재건한 때부터 예수님과 바울의 시대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제2성전기의 문서들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과 바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이 시기의 문서들을 매우 광범위하게 연구했고, 몇 개의 문서들만 연구하고 유대교를 잘못 평가한 과거의 학자들을 하나하나 비판한 후(대표적 비판의 대상은 불트만과 그의 학파의 신학자들이었다),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라고 결론 내린 학자들의 결론은 심각한 오류이고 유대교는 계약적 율법주의의 특징을 갖고 있는 은혜의 종교라고 결론지었다.
샌더스가 유대교는 계약적 율법주의의 특징을 갖고 있는 은혜의 종교라는 결론을 내린 이후 던이나 라이트와 같은 새 관점 학파의 신학자들은 이 샌더스의 결론을 이어받아 유대교를 계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하고 이 규정 위에서 바울의 신학을 분석했고, 루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바울 해석을 발표했다. 이 새로운 바울 해석이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이론이다. <계속> ▶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2)… 김명용 전 총장의 책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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