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계약적 율법주의는 바른 구원론의 바탕이 되는 이론일까?
샌더스 이후의 새 관점 학파의 학자들은 유대교의 계약적 율법주의를 바울신학에 적용했다. 이는 출발점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계약적 율법주의를 정착시킨 샌더스는 바울의 사상이 계약적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신학자들이 계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바울신학을 해석했고, 이 해석에 기초해서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이론을 발전시켰고. 루터에서부터 시작된 개신교의 구원론에 치명적 손상을 입혔다.
계약적 율법주의가 바울의 가르침의 내용이 틀림없다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약적 율법주의는 가톨릭의 구원론에 근접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이 과연 새 관점 학파에서 언급하는 계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일까? 샌더스는 바울의 관점을 정확히 파악했고. 더 새 관점 학파(newer perspective)의 바클레이(J. M. G. Barclay) 역시 바울의 관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샌더스나 바클레이의 관점은 오히려 옛 관점과 유사하다.
바울은 율법의 무능을 언급했고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곤경을 애기했다. 죽음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결코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다. 율법의 무능에 대한 이해는 바울신학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이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하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는 율법의 무능과 관련해서 이해되는 매우 중요한 대화이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한 부자의 질문은 율법의 행함과 구원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답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은 없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 느니라"(막 10:27)라는 답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바울의 가르침은 새 관점 학파의 계약적 율법주의의 틀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계약적 율법주의의 틀이 붕괴되는 그곳에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시작된다. 구원은 하늘로부터 오고 예수님으로부터 온다.
율법도 무능하고 인간도 무능하다. 우리는 율법주의가 역사의 예수님의 최대의 적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학자들은 회칠한 무덤이고 독사의 자식들이다. 왜 그들이 회칠한 무덤이고 독사의 자식들일까?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들의 가슴은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외식하는 자를 만들고 남을 정죄하는 자를 만들지만 참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가 무능하고, 인간 역시 무능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의를 행한다고 자랑할 수는 있지만 그 자랑은 거짓이고, 자랑 뒤에는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악취 덩어리일 뿐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는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철저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악취나는 냄새 덩어리일 뿐이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새로운 의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이 탄생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의이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및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및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6)
이 새로운 의는 가슴에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이다. 그런데 이 가슴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의는 율법에서 탄생하는 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으면서 자라기 시작하는 새로운 의이다.
역사의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위선을 부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매우 싫어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리" (마 7:21)는 말씀도 같은 정황 속에서 이해되는 말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라는 표현은 마태 공동체의 정황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의 예수님을 부를 때는 랍비여와 같은 표현을 썼지 주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태복음 7:21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율법학자를 비판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하나님을 주여 주여 부르면서 가슴에 사랑과 자비는 전혀 없는 독사의 자식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마 7:21이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인용되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다. 그것은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학자로 대표되는 옛 율법의 세계가 아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고 (눅 5:28),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넓고 크신 자비하심을 배우고, 그 자비하심에 의해 용서받은 사람들은 가슴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이 새로운 인간의 출생은 율법이라는 옛 뿌리에서 출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출생한 사람들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주의의 틀을 완전히 넘어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말씀이다.
무한한 용서는 율법에서 생겨나는 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알고 믿었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의이다. 복음에서 생겨나는 의는 율법에서 만들어 지는 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기관 보다 더 나은 의는 복음에서 오는 의이고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의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경험하는 도덕적 의와는 전적으로 다른 의이다.
원수사랑의 교훈은 율법주의의 틀을 철저히 파괴하는 가르침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눅 6:36)는 말씀은 원수사랑을 포함한 넓고 크신 자비를 가르치신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시고, 지금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만 경험하는 자비가 아니다.
새 관점 학파의 계약적 율법주의는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그 다음에는 율법을 지키는 율법주의의 삶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칭의의 순간부터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계속되는 무한한 은혜이다. 이 무한한 은혜가 십자가에 계시된 것이다.
이 조건 없는 무한한 은혜를 율법주의와 섞으면 안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힘을 다해 반대한 거짓 형제들이 바로 복음을 율법주의와 섞은 자들이었다. 바울에 의하면 이들은 복음에서 오는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빼앗아 가는 자들로 복음의 적들이다.
새 관점 학파의 계약적 율법주의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힘을 다해 반대한 거짓 형제들의 관점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보캄(R. Bauckham)은 계약적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에서 변두리로 옮긴 이론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비판은 옳다.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에서 밀려나가고 그 자리를 율법주의(nomism)가 차지했다고 할 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바울의 비판의 대상이 된 거짓 형제들과 이미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 밖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를 전하는 자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이 율법 밖에서 나타난 무한한 은혜 때문에 조건 없는 윤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의는 이 조건 없는 윤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상상하고 행하고 있는 의가 아니다. <계속>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4)… Ⅱ. 계약적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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