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추적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보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해답의 열쇠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성경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에 대해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가인이 악한 자, 즉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다고. 그러면서 성경은 다시 언급하기를 가인이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린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자녀요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 사건은 형이 아우를 죽였다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님을 짐작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세계에서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자, 이 두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 이후부터 현재까지 종속하고 있음을 성경은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시편 1편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되는 이 두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둘의 삶의 형태와 그 마지막이 너무나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즉 물과 기름이 결코 섞일 수 없듯이 의인과 악인의 삶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부류에 속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3장 5절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성경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4장으로 가서 이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3절~5절)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다는 그것입니다. 그러자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신 것입니까. 가인이 아벨처럼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사를 드리지 않고 농사지은 곡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제물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의 말씀이 증언했듯이 가인이 이미 마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인의 행동이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와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허무라는 뜻을 지닌 아벨로 지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 여자의 후손이라고 해석한 나머지 그렇게 기뻐했건만 그러나 가인이 자신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일삼자 그만 삶의 희망줄을 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이름 속엔 아담과 하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가인으로 인한 삶의 허무함 말입니다.
가인의 이같은 삶의 결과가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심입니다.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가인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장 11~13절)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악을 행하면(마귀를 기쁘게 하는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서 제사(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준엄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드린 예배를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마당만 밟는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은 아벨을 통해 여자의 후손이 오도록 하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마귀가 가인을 통해 여자의 후손이 이 땅에 오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계속) <저작권자 ⓒ 뉴스와종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