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나라가 독일과 수교를 한 것은 1883년 11월 26일 한국과 독일 통상우호양해 조약 체결이 시작이다.
그리고 1년 후 1884년 11월 18일 주한독일총영사관이 개설(초대 총영사 Zembsch)되어 우리나라와 독일과의 우호가 시작된 것이다.
1958년 8월 1일 양국 정부는 대사관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1986년 4월 전두환 대통령, 1995년 3월 김영삼 대통령, 20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 2005년 4월 노무현 대통령, 2011년 5월 이명박 대통령, 2014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국빈 방문하였다.
우리나라와 독일은 한동안 지구상에서 같은 입장인 남북과 동서로 양분화되었지만,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동서가 평화통일을 이룩하였고 이제 우리나라만 남북분단의 현실이다.
대한민국과 독일과의 양국 수교는 국가 간의 수교와 경제, 무역, 과학기술, 문화체육 등의 여러 가지 양해각서가 있지만, 여기에는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의 인력에 대한 송출(送出)부분이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60년이 지났지만 당시에는 주요한 이슈였다.
우선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의 독일(당시 서독) 탄광과 병원에 송출하는 배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며, 당시 우리나라와 독일 정부 간의 협상으로 국내 탄광에서 훈련받은 광부들이 1963년 12월21일 제1진으로 선발된 123명이 독일로 향하였다.
1978년 독일 정부의 외국인 근로자 취업이 중지까지 38개 국가에서 6,990,510명의 탄광 근로자들이 독일에서 석탄생산과 관련업에 근무하게 되었다.
터키가 1,965,577명으로 가장 많았고, 우리나라는 7,968명이 독일 각지의 수천 미터 지하 막장 석탄산업 현장에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검은 땀을 흘리며 외화를 벌어서 모두 고국에 송금시키곤 하였다.
우리나라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 해외인력진출이지만, 당시 정부는 파독 광부들의 실질적인 목적은 경제개발의 원동력이 목적이었던 외화획득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한 정부의 해외인력 수출이 국가 경제와 사회경제기반이 되는 부분의 지대함을 계산하여 당시 우리나라 전쟁 이후 복구와 혼란 속의 국가 경제 개발과 발전이라는 중요정책으로 입안하여 실행하였다고 본다.
그러한 이면 속에는 국내의 고학력 출신들의 넘치는 유휴 노동력의 국내 실업률 감소와 함께 두 마리의 토끼를 가지는 사회 안정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국 근로자들의 성실함으로 인하여 1965년부터 1977년까지 11,057명의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성실함으로 인정받으며 외화획득에 공헌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의 한강의 기적을 이룬 “파독 광부 백서”를 보면서 이제까지 대충 알고 있었던 이분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 Emotion)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국내경제의 열악한 상황에서 파독 광부들과 파독 간호사들의 강도 높은 피땀의 대가인 독일 차관으로 국내 고속도로와 기간산업이 활발하게 발전시키는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 근대 산업화의 근간이 되고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66년부터 1969년 철수까지 베트남 전쟁에 우리나라 젊은 국군 용사들의 파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바치며 평화수호를 위하여 헌신하였고, 1965년부터 1981년까지 중동 건설현장으로 진출한 근로자들 역시 많은 외화를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헌하며 국민경제와 가족들에게도 가정경제를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한 대한민국의 역사인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가정에서는 아주 서민들이 아니면 연탄이나 19공탄, 22공탄 등이라는 용어 자체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다.
간혹 학생들에게 석탄을 아느냐? 연탄을 아느냐? 돌발 질문을 하면 석탄은 보지 못하였고 연탄은 알지만, 몇 구공탄인지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국가 경제가 발전한 근본적인 원동력과 고속도로 개발과 풍부한 산림녹화가 잘 보존된 것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일부 학생들은 우리나라는 IT산업으로 급성장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의구의 질문을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1960년부터 우리나라 국내 사정도 산업이나 가정의 연료는 석탄과 연탄으로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함께하는 필수적인 연료였다.
그간 두 번의 국제적인 유류파동과 석유 한 방울 생산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석탄산업이 무조건이었다. 그러나 석유파동이 안정화 되면서 정부는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에서 1989년 주유종탄(注油從炭) 정책으로 석탄산업 합리화(石炭産業 合理化)라는 미명 하에 채산성이 높은 탄광들마저 폐광 수순으로 급격하게 3백여 곳의 탄광들은 흔적도 없이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파독 광부들과 석탄산업의 역사는 오랜 세월 속에 잊혀 지나가고 있고, 이제 국내 4곳의 탄광들이 내년이면 대한민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국내외 석탄산업 탄광 역사와 모든 석탄산업 영웅들의 대한민국 발전에 혁혁하게 공헌하고 헌신 기여한 그 역사들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역사에 올바르고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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