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주일마다 새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
▶ 들어가기(서론): 정암(正岩) 박윤선(朴允善, 1905-1988, 이하 ‘정암’으로도 표기함) 목사는 한국교회 교파를 초월하여서 가장 많이 듣는 존귀한 이름일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들의 설교나 글쓰기에서 계속 '박윤선'의 이름이 자주 회자(膾炙)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박윤선은 어떤 인물일까? 왜 사람들은 '박윤선 목사’, ‘박윤선 박사'를 그렇게 존경하며 사랑할까?
정암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구약성경 전권 주석자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한국교회 각 신학교 도서관과 목회자/신학생/성도 서가에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전집은 '필수도서’였다.
서평자(필자)는 2022년에 파라과이 아순시온 한인교회 도서관에서 정암의 자서전을 만났다. 박 목사님을 직접 뵈는 것처럼 반가워 단숨에 <성경과 나의 생애>을 읽었다.
당시 필자는 파라과이 선교사역 만 7년을 마감하고 이삿짐을 정리하던 바쁜 때였다. 한국교회의 나다나엘 정암 박윤선 박사님!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요1:47).
정암을 가장 가까이서 59년간 지켜보았던 故 방지일(1911-2014) 선교사님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박 형님은 어느 면으로나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비치곤 하였다. 그의 하는 말, 그의 행동에 대하여는 ‘정말 그럴까?’ 하고 의혹을 가져 볼 만한 여지가 전혀 없다. 그 머리로부터 발까지 드러나는 진실성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점이다. 그는 소유욕이 없다기보다도 소유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함이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 pp. 122-23)
1987년 4월 27일, 남서울교회서 정암의 “성역 50년” 감사예배, 그 역사적 모임에 필자(총신 신대원 1학년을 ‘2번째’ 수학할 때 햇병아리 전도사로서)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날의 이런 특별한 모임은 (당사자인 박윤선 목사님 모르게) 극비리에(?) 홍정길 목사 등 애제자들이 준비하였다. 필자는 그 당시 박 목사님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리 준비한 기념 논총 <敬虔과 學問>을 받은 후, 떨리는 목사님의 음성… 지금도 생생히 들린다.
필자는 깨알같이 수첩에 이렇게 요약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북한 평북 철산군 시골집에서 밤에 불을 비쳐서 참새를 잡곤하였습니다. 그때 내 손안에 잡힌 참새가 두려움으로 심장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그 참새와 같은 두려움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필자는 과연 하나님을 경외(敬畏)함의 의미, 곧 ‘하나님을 공경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배웠다. 정암은 이런 고백을 하시고 이듬해(1988년) 6월에 소천하셨다.
<성경과 나의 생애> 자서전은 정암이 1979년(75세)까지의 자신의 생애를 ‘아주 간략하게 쓴 자서전’에 17편의 유고원고와 방지일 목사님의 글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
“박 목사님이 주님의 나라로 가신 지 만 4년, 간략하나마 그의 자서전을 펴내면서 여기에 그의 유고 중 몇 편(그의 사상과 신학이 요점적으로 나타난 글)과 방지일 목사님의 글(”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을 실음으로 박 목사님의 신앙의 발자취가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하였습니다” (pp. 25-26)고 영음사 편집부는 머리말에서 밝혔다.
정암은 1905년 평북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 3여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부터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과 오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공부하었다. 17세에 스스로 동문동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18세 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80릿길(32km) 선천 대동소학교(현 국민학교) 6학년에 편입.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석사(Th.M) 졸업, 평양 장로회신학교 성경원어 강사 및 총회 표준 성경주석 편집부 근무, 제2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 변증학 및 성경원어 연구, 봉천 만주신학교 교수,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에서 신약학 연구, 서울 총회신학교 교수, 교장, 대학원장. <성경주석 완간>(1979년), 총신대학 대학원장, 수원 합동신학원 초대원장, 명예교장, 기타 저서 <영생의 원천 > 등의 설교집 3권, <성경신학> 신학서 등이 있다.
필자는 정암의 자서전, <성경과 나의 생애>에 나타난 평생학습자/진정한 개혁주의자/기도와 말씀연구 전무(專務)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간단히(?) 書評하고자 한다.
1. 일평생 공부하고 연구하는 평생학습자 박윤선 박사
“김선두(金善斗) 목사님이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때에 부흥가이신 길선주(吉善宙) 목사님께서 신성중학교에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며칠 동안 사경회를 인도하셨다. 그의 계시록 풀이는 세대주의적이었는데 내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하였다 (중략)
그의 계시록 강해를 들어본 결과는 왜 그런지 허전한 느낌이었고, 요한계시록에는 무엇인가 깊고 좋은 내용이 있을 터인데 강사 목사님께서 이 책의 깊은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중략)
목사님은 나의 은인(恩人) 중 한 분이다. 그는 나로 하여금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도록 밀어주셨다. 그 결과 내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p. 43. 정암은 어린 시절부터 진리를 찾는 끊임없는 질문과 호기심이 많았다. 신학생 시절부터 여러 교수들로부터 배우며 성경연구와 어학연구에 매진하였다)
“신학교 시절부터 나는 성경 연구에 다소 즐거움을 맛보며 방학 때는 교수님의 성경주석(영문)을 빌려 가지고 고향 장평동에 가서 읽은 기억도 있다” (p. 50)
“마포 삼열(馬布三悅, S. A> Moffett) 선교사는 한국 초대의 중진 선교사였다. 내가 입학한 그 해에는 그가 소요리문답을 가르쳤다. 그는 그의 관대한 성품과 교부(敎父)와 같은 무게 있는 신앙 인격으로 많은 감화를 끼쳤으며, 학문보다는 성경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과 보수적인 신학 입장이 무언중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된다. (p. 51)
“나는 재학 중에 어학(영어, 독일어) 공부도 힘썼는데, 언제나 독일어 문법책을 손에 들고 다녔던 것이 생각난다. 이처럼 어학에 치중했던 것이 후일 성경주석 저술에 유익한 결과가 되었다. 이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p. 58)
‘목사는 유리집에서 산다’. ‘목사는 주일마다 새 목사가 되어야 한다’
“곽안련(郭安連, Charles A. Clark) 교수는 실천신학을 담당하시고,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등 여러 과목을 가르치셨다. 그는 열정가이고 근면하였다 (중략)
자극성 있는 표현으로 종종 학생들을 깨우쳤다. 내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그의 교훈을 두어 가지 소개한다.
“목사는 유리집에서 삽니다” 이 말은, 교우들이나 불신자들이 목사의 생활까지도 자세히 훑어보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는 주일마다 새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목사는 기도를 힘쓰고 성경 연구도 힘써서 주일마다 강단에 나설 때는 교우들에게 전보다 더 새롭고 영적인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p. 54)
정암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의 모델.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이 말씀대로 이 땅의 모든 목사/선교사/신자는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정암은 일생 ‘새 목사가 되어 강단에 서신 것’이다.
“박형룡(朴亨龍) 박사는 나의 1학년 시절부터 교수하기 시작하셨다. 그는 변증학 방면의 여러 과목들을 담당하였는데, 학구적으로 많은 유익을 주셨다. 나는 그에게서 고린도후서를 배웠고, 기타 몇 과정 강의를 들었다. 박 박사께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중략)
그는 신학적으로 한국 장로교의 기둥이었으며,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신학교 교장으로 수고하시면서 막대한 업적을 남겼다.” (p. 55, 박형룡 박사와 2분의 관계 설명)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있는 동안 틈틈이 화란어를 자습하였다. 삼대(三大) 칼빈주의 신학자 중 두 사람(카이퍼, 바빙크)이 화란 사람이니, 그들의 신학 체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란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p. 75, 정암의 진리에 대한 타는 목마름과 학구열을 배우게 하소서)
2. 철저한 초지일관(初志一貫) ‘오직 성경’에 올인 한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자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란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으며, 교수들로부터 “성경신학”이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성경신학이 없었던 그 시대에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단맛 있게 가르쳤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p. 56)
“나는 일찍이 근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나의 죄인 됨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성경이 나의 죄인 됨을 알려주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됨을 알려 주었다” (p. 62, 동서양 고전, 인문학의 한계다)
필자는 정암은 어린 시절 한학(漢學)을 10년간 동양학을 깊이 공부한 것을 주목한다. 사서와 오경을 다 마쳤고 “예기와 주역 외에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암송할 정도로 통달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는 주해(註解)까지 다 외웠다. 저녁마다 벽을 향해 돌아앉아서 암송하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p. 35) 이런 바탕 위에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깨닫는 기쁨 감격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나는 이때도 3년 동안 신학교의 커리큘럼대로 신구약 각 책에 대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것과 영문 성경주석을 읽는 것으로 그쳤을 뿐, 자발적으로 간절히 성경을 상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의 권위 문제를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나의 영적 우둔함과 태만을 증거해 준다.” (p. 56)
“성경은 책 중의 책이 아니고 “책들 위의 책”이라고 해야 옳다. 그 이유는, 성경은 모든 책들을 심판하는 책이기 때문이며, 성경은 자증자(自證者)이기 때문이다.” (pp. 56-57)
“누구든지 “성경 말씀이 최고의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하게 되면, 성경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성경 수준에 가까운 내용이 다른 책에도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p. 57, ‘성경 말씀이 최고의 진리’는 틀린 말임을 새삼 깨닫는다)
정암은 미국 웨스트민스트신학교 시절 메이천 교수로부터 ‘언제나 침착하면서도 열심이 있었고, 온유하며 솔직하여 진실한 학자의 모습으로 일관하였다’고 회상하며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 따라서 사람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결정됨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메이천 박사는 위대한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진실한 신앙가였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불철주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성경학자였으며, 모든 신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신앙적으로 지도해 주었다.” (p. 72)
“나는 신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이때부터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성경의 권위도 깨닫게 되었고, 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성경 해석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성경 해석을 바로만 한다면 기독교가 어디까지나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라는 사실이 나에게 명백히 알려진 것이다.” (p. 73)
개혁주의의란?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 곧 성경주의다” (박윤선 박사).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들이 흔히 ‘성경대로…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누구든지 실제로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 주장에 잘못된 내용이 들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 (p. 79, 개혁주의의 명쾌한 정의!)
3. 일평생 엎드려 기도일관(祈禱一貫)한 기도의 사람 박윤선 박사
“신학운동은 학문 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을 높이는 운동이다.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동시에 기도운동이 되어야 한다. 기도 없는 연구작업은 마침내 인본주의로 떨어지게 된다. 참된 기도로 뒷받침하는 신학 연구는 동시에 경건(敬虔)의 능력을 소유한다.” (p. 96, 올바른 신학 함은 곧 기도운동이다)
“숭전 재학 때의 일이다. 박 형님은 언제나 성경에 열중하여 있었으니, 계속 성경을 외우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새김질하는 소나 양같이 그는 성경을 계속 반복하여 읽는 것이었다.” (p. 118) 방지일 목사가 가장 가까이서 본 박윤선 박사의 모습이다.
“나는 성경을 주석하면서 가끔 풀기 어려운 난제를 만났을 때 ‘이 구절 말씀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를 캐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거기서도 단맛 있는 진리가 발견되곤 하였다. 그뿐 아니라, 밤중에 잠에서 깨어 고요히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뜻이 깨달아지면 즉시 기록해 놓고 다시 잠을 자기도 하였다.” (p.161, 박윤선 주석은 기도로 쓰신 주석임을 깨닫는다)
“나는 산과 들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기도하려는 의욕 때문이다. 산을 보든지 들을 보든지 나의 마음에는 ‘저기에 가서 기도했으면 좋겠다’하는 의욕이 일어난다. 나는 주택을 구할 때도 산 가까이 위치한 집을 원한다. 그것은 내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 위함이다.” (p. 167)
정암은 산과 들을 좋아한 것도, 주택을 구하는 것도 기도하는 한적한 장소를 찾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요한복음 1:48의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였던 것같이, 정암도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 말씀 연구와 묵상에 올인한 일생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응답된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어떤 기도들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기도응답은 반드시 기도자에게 다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는 기도자의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응답 여부를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을 생각해 보자…개인주의적 내용이 아닐수록 참된 기도이다. 그러므로 많은 참된 기도들이 기도자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뿐 아니라, 많은 기도들이 영적으로 이루어지며(눅 1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어서 이루어진다(롬 8:26-27)” (p. 168, 아! 얼마나 명쾌한 기도론인가!)
“나는 어떤 때에는 설교 준비를 먼저하고 그다음에 기도한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먼저 기도하고 그다음에 설교 준비를 한다. 나에게는 이 두 가지 작업이 병행한다. 경중으로 말하면 성경연구가 더 중요하지만 기도도 없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가 바친 만큼 주심에 있어서 에누리가 없으시다. 즉 성경연구와 기도 준비에 시간을 얼마나 바쳤는가에 따라서 그 설교의 성패가 좌우된다. 이 사실은 나의 평생 설교할 때마다 체험하여 온 바이다.” (pp. 170-71,
정암의 일평생 체험에서 나온 ‘설교자의 기도생활’ 이 임종 직전의 강의를 듣는 행운을 필자는 누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4. 박윤선 박사의 성경 66권 주석 전질은 1,000편의 ‘주옥설교집’이다.
“나의 주석에는 전질 가운데 1,000여 편의 설교가 들어있다. 그것은 성경을 깨달은 나의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의 약동이 있어서 그 깨달은 진리를 설교로 증거한 것들이다.” (p. 81)
“설교자들이 종종 체험하는 바이지만, 나도 언제나 설교를 하고 난 후에는 마음이 유쾌하고 신령한 기쁨이 임하곤 하였다. 나는 성경주석을 집필하면서 그 말씀의 생명력을 여러가지로 체험하였고, 그 깨달은바 진리를 설교로 작성하여 나의 주석에 많이(1,000편 이상) 포함 시켰다.” (p. 161, 필자는 이따금씩 설교한 후에 유쾌하고 신령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1961년 1월에 서울 서대문 동산교회에 부임하여 3년 동안 목회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에 굳게 서는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나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의 산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 교회가 개척 교회이니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목회하는 동안 나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산교회를 목회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15권인데, 이것을 3권으로 편집하여 발행하였다.” (p. 109)
“나는 항상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고, 내 마음은 성경을 주석할 의욕으로 언제나 불이 붙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일을 하는 때에도 마음속에는 속히 책상으로 돌아가 성경 주석을 쓰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마음은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명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pp. 161-62)
정암은 성경 66권을 성경 전권 주석 집필 사명완수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경주하였다. 언제나 성경묵상과 기도로 심령은 불붙고 있었다. 하나님이 정암에게 주신 이 사명감은 온 “인류를 상대하고 발행하는 것”이라고 까지 고백하였다.
“문서 사업은 귀하다. 글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또 언제나 말한다. 그러니만큼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문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서를 출판한다는 것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p. 163, 필자 강조, 선교현장의 동료 선교사들을 위한 서평쓰기도 이런 자세로 글쓰기를 계속해야 함을 깨닫는다)
“성경 말씀과 관련된 글을 쓰는 이들과 이러한 책들을 발행하는 이들은 특수한 태도로 그 작업에 임해야 된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해야 되며, 또 온 세계 인류를 의식해야 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책을 발간하려고 힘써야 하며, 또 그 책은 온 인류를 상대하고 발행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p. 164, 기독언론, 기독 작가가 명심할 격언)
5. 내가(방지일 목사) 59년간 본 박윤선 목사 ;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
“필자[방지일]는 박 목사님을 “형님”으로, 그는 필자를 “형제”로 부르기를 59년간 긴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박 형님을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이라고 불러왔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다. 그는 주님이 찾으시는 참 이스라엘 사람임에 틀림없다.” (p. 113, 필자도 꿈에도 소원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 올린다)
“주님께서는 박 형님이 항상 엎드려 있는 그 모습을 보셨음이 틀림없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시절에는 새벽마다 교실에 가서 엎드려 살았고, 특별한 기간에는 우단(방수 처리가 되어 있는 천) 한 조각과 미숫가루 한 병을 준비해 가지고 산으로 갔었다. 평양 모란봉 위에 가재란 곳이 있다. 주님은 그곳에 꿇어 엎드린 박윤선을 보셨을 것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이름을 얻은 나다나엘처럼 그는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p.114)
“우리 시대의 중학교 학제는 5년이었는데, 영어 교과서는 뉴 크라운(New Crown)이었다. 박 형님은 그 교본을 1권부터 5권까지 전학년분을 모두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내리외우곤 했다. 우리는 그의 영어 암송을 들을 때마다 어떤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이나 훌륭한 명곡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상쾌한 기분이 되곤 했다.” (p. 118)
59년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방지일 목사님의 이 고백은 천만금의 무게를 갖는다. 2014년 103세로 별세한 한국 교회사(敎會史)의 ‘산 증인’이신 방지일 선배 선교사님의 증언!!
“기름을 짜자.” 건성으로 말고 나의 기름을 짜내는 것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한번은 박 형님이 미국에서 필자에게 엽서를 보냈다. 엽서에는 “之一아! 오늘 강당은 네 마지막 강단인 줄 알고 유언적 설교를 할 것이다.” 이 말뿐이었다. 실로 간단하나 항상 하던 말이기에 깊이 새겨졌다.” (p. 133, 모든 선교사/목사는 매주일 ‘유언적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목사는 강단이 없으면 죽은 목숨”… 따라서, 은퇴 목사, 선교사는 영성관리가 초비상이다
“나는 박 목사님께 말씀하기를 ‘집필에만 전념하십시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였더니 박 목사님이 말씀이 “목사는 강단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라고 하면서 도리어 필자에게 교회 강단 소개를 요청하셨다. 참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p. 137)
당시 방지일 목사님은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서 박윤선 박사님을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가질 때, 박 목사님은 ‘교회 강단 소개’를 요청, 방지일 목사님은 ‘중립 교회’를 소개하고자 할 즈음에 박윤선 박사는 서대문 동산교회에 부임하였다.
“필자가 (제주도에서) 돌아오자 박 목사님께서 찾아오셨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박 목사님의 말씀이 ‘교회는 중립도 좋지만 목사는 소속이 없으면 치리회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므로 그렇게 되면 안돼요. 목사는 반드시 치리회에 소속이 되어야 해요’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목회자를 가르치는 신학자로서의 귀한 교훈이라고 생각하였다.” (p. 138, 필자 강조, 대개 신학교 교수들의 영성은 그저 그런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여기에…)
실제로 이 말씀대로 박윤선 박사님은 일생 신학교 교수로서 매 주일 강단을 지키셨다. 필자는 생각한다. 전세계 선교현장의 선교사도 반드시 치리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선교사의 자기관리, 영성관리를 위한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 나가기(결론): “교역자(선교사)는 종교업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서평자는 정암 박윤선 박사님은 명실상부(名實相符) 한국교회의 최고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총신대원 1학년때 박 목사님과의 만남 이후, 이듬해(1988년) 2월 ‘목회자와 기도생활’ 주제의 세미나(화평교회)에도 제일 앞자리에서 참석하였다.
많이 쇠약하신 박 목사님은 마지막 시간에 의자에 앉으셔서 한국교회의 “...있을찌어다” 축도가 성경적인지를 깊이 강론하셨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축도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신 흔적이 분명하였다. 한 마디로 ‘있을찌어다’는 우리 말 사전에서 ‘반명령어적 표현’이므로 적당치 않으며 차라리 ‘축원하옵나이다’로 축도하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제시하셨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의 축도에 대한 소연구논문 발표는 합신교단의 핵심 목회자들과 교수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그해 6월에 박 목사님은 별세하시기 직전까지도 계속 진지하게 연구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귀하고 귀하였다. 필자는 그때 박윤선 박사님의 생생한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축원하옵나이다’가 더 성경적인 축도라고 믿는다. 예장 합동교단의 목회자들은 지금도 “...찌어다” 축도가 대세(80%)이다)
“신학은 성경을 교리적으로 사색하는 학문”이다. 물론 이것은 특수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적 학문이다. 따라서 신학의 근거와 규준(規準)은 성경 뿐이다.” (p. 95)
“나의 주석저술의 동기는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안 후에 이 성경을 올바로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경대로 믿음을 가지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p. 160)
정암은 그의 일생의 사명/과업인 주석저술의 동기도 먼저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알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디모데후서 2:15의 바울 사도의 권면 말씀 그대로다. 별세하시는 순간까지 배우고 연구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사신 박윤선 목사님!
“교역자는 종교업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롬 12:1). 종교업자가 성행하는 시대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죄에 빠지기 쉽다.” (p. 173)
“목사들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일에 치중하여 주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줄로 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으로는 계속 주님을 찾아야 하겠고, 언제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p. 189)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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