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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저, “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 배안호 박사 서평

“그리스도인은 왜 생각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성경적 사고법”

오병훈 국장 | 기사입력 2024/05/09 [11:00]

존 파이퍼 저, “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 배안호 박사 서평

“그리스도인은 왜 생각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성경적 사고법”

오병훈 국장 | 입력 : 2024/05/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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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안호 박사(영국 선교사, 전 총신대 칼빈대 명지대 교수)    

 

들어가는 말(서론): 생각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이르는 필수적인 길이다”(존 파이퍼)

 

당신은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도구가 되기를?”. 이 책은 생각하기야 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불을 붙이는 중요한 행위임을 성경 말씀을 통해 증명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지성을 추구하다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준다. 하나님과 이웃을 깊이 사랑하고 싶다면, 상대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맞서 겸손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책 뒤 표지) 그리스도인은 왜 생각해야 되는지 명쾌한 답이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믿음이 최고인가?”, “성경은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되는가?”, “비평적 지성과 성경읽기는 상호 조화가 되는가?” “지성적으로 성경과 과학은 양립이 되는가? 필자(서평자)는 성경은 비과학적.비논리적.비이성적 책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예수쟁이를 심히 핍박하고 조롱하였다. 예수쟁이는 성경을 연구(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왜 그런가?

 

<존 파이퍼의 생각하라(Think)>(존 파이퍼, 전의우 옮김, IVP, 2014). 존 파이퍼(John Piper(1946년생)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탁월한 설교자요, 기독교 희락주의자(喜樂主義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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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그는 신약학교수 6년째 안식년을 보내며, 로마서에 관한 책을 쓰다가 설교와 목회에 대한 열정에 불이 붙었다. 1980년부터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말씀으로 승리하라>, <영적 침체를 극복하라>, <하나님을 기뻐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등의 저서가 있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 전체 13장 구성되었다. 본서는 존 파이퍼 자신이 하나님의 세계와 성경말씀과 소통하면서 느낀 것들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2장에서 그는 250년 전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얼마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3장에서 자신이 언급하는 생각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의 논한다. 저자의 글은 너무나 논리가 명쾌 상쾌 유쾌하다. 속이 시원하다. 그의 선명한 글쓰기는 그의 시원한 설교같이 통쾌하다.

 

1. ‘생각하기란 무엇인가; “읽기는 곧 생각하기다

 

생각은 무엇인가?’ 답은 모든 지성을 사용하는 일체의 행위이다. 성경은 생각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생각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 관한 가장 분명하고 권위있는 지식을 드러내셨다. 성경은 기록된 자신의 말씀(1:1)이다. 말씀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주된 자리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그런데 성경은 책이며, 책은 생각을 요구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를 토대로 삶의 모든 부분에서 알차게 생각할 수 있다.” (p.45)

 

파이퍼는 모티머 애들러(Mortimer Adler)<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Hot to Read a Book, 멘토)를 먼저 소개하였다. 그는 애들러를 통해서 진지한 책 읽기의 신나는 세상에 아주 감동적인 첫발을 들여놓았다고 고백한다. 모름지기 책 읽기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위대한 책은 평범한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수준이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믿음이다”(p.47, 책 읽기는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읽기는 캐내지길 기다리는 산더미 같은 보화” → 읽기는 생각하기다’.(읽기의 황금률)

 

애들러는 독서법에 관한 시각을 감격적이면서도 지혜롭게 제시한다. 당신이 몇 살이든 여태 이 책을 읽지 못했다면 꼭 구해서 읽기를 바란다. 애들러의 핵심은 읽기는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읽기는 곧 생각하기다. 읽기는 캐내지길 기다리는 산더미 같은 보화다. 내가 말하려는 내용 중에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다.” (p.48)

 

서평을 계속 쓰면서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 파이퍼는 이를 책 읽기의 황금률이라 하였다. ‘저자를 좇아 저자처럼 생각하라’, ‘저자가 전하려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네 지성을 사용해서 열심히 노력하라’.

 

서평자도 이런 마음으로 평소에 독서하며, 서평을 계속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6,70여 개의 서평을 4,5년 째 쓰면서, 저자들로부터 큰 격려와 칭찬을 듣는다. “배 선교사의 서평이 내가 쓴 책보다 더 좋아요”. “내 마음의 생각을 서평에서 잘 써주어서 고마워요”.

 

질문이 이해의 열쇠다. → 다양한 질문으로 더 깊이 배우라

 

저자는 왜 이 단어를 사용했는가?” “저자는 다른 곳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왜 저자는 이 진술들을 했을까?”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런 접속어를 왜 사용했을까?”, “저자의 말은 성경의 다른 저자가 말하는 내용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저자의 말은 나의 경험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들을 계속 제기해야 한다.

 

필자는 지금도 매일 새벽 성경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필자의 쌍둥이 아들들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질문들이 많았다. 예수님도 12살 어린 시절에 질문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었다. (2:46).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하나님이 응답하신다(7:7-12)고 하셨다. 무엇을 받고 찾으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 몸살이 나 계신다.

 

금고의 열쇠, ‘그러므로’ ‘따라서’ → 논리는 사랑을 위해서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므로’, ‘따라서를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여기에 있는가? ‘그러므로가 나오면 무조건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왜냐하면은 논리(logic)와 추론(reason)하게 하는 접속사이다. 성경은 매우 논리적이다. 성삼위 하나님 자신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영감은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전체가 결론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해도 좋다. 이 같은 논리는 사랑에 엔진을 돌리는 연료이다.

 

2.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받은 선물: “지성은 온전한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

 

지성’(생각)감성’(느낌) → 삼위일체적 생각과 느낌이 그 근원이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18세기 미국 식민지 시대 청교도 신학자.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본성을 인간의 생각과 느낌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서 계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기쁨의 행위로서 나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느끼며/알고 사랑하는 인간 본성의 기초는 삼위일체의 내적 영광이다. 요약하면, 인간 본성에 맞게 살려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분을 진정으로 아는데 지성을 사용하고, 그분을 합당하게 사랑하는 데 감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 파이퍼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명료한 진리가 감정에 불을 붙인다. → 지성과 감성은 필수! “지성은 감성의 불을 지핀다”.

 

당신이 능력이 닿는 만큼 거룩한 것들을 알려고 애쓰라. 기독교 신앙의 원리에 대한 교리적 지식을 하나라도 놓치지 말라”(p.41)

 

이 말은 학문적 호기심을 장려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탄하면서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지성이 감당해야 할 의무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감성(하트)으로 하나님을 기뻐할 때 절정에 이르며, 지성은 온전한 기쁨을 위해서 존재한다. 저자(존 파이퍼)는 이러한 지성과 감성의 놀라운 조화는 조나단 에드워드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읽기는 생각하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3. 믿음과 이성의 관계;

 

덮어 놓고 믿기만 하세요’(?) → 믿음은 생각하며 깨달을 때 성장한다.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이성(지성)을 잠시 접어 둬야 하는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에 이르는 길이라면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는 서로 조화가 되는가?” 성경은 직선적인 아리스토텔리스적 논리(서양식 논리학)가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뿌리에 둔다. 신약성경은 신자가 계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성(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성경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 바울은 10회 걸쳐서 사람들을 설득’, ‘강론하여사람들을 논리적으로 믿게 하고 있다. (17:2, 4, 17; 18:4, 19; 19:8, 9; 20:7, 9; 24:25).

 

바울은 무턱대고 믿으라고 윽박지르지 않았다.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3:4)고 썼다. 바울은 지성을 활용하여(읽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비밀)에 이르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조명이 아울러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이 부분에서 바울을 따르라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조명하시는 역할을 모두 인정하라고 호소하기 위해서다. 바울에게 이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둘 모두의 문제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왜냐하면]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왜냐하면 이라는 짧은 단어에 주목하라. 우리에게 왜 이 단어가 여기에 있는가?’라고 묻게 하는 아주 중요한 접속사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라고 손짓한다.” (p.73, 그래서 서평자는 성경 속독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의 네 가지 땅의 비유(13:3-9)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분명히 생명이 없는 땅과 결실하는 땅의 차이는 깨달음(이해)에 있다. 들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 깨달음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설교를 들을 때도 듣는 바를 생각해야한다. 똑같은 설교를 같은 장소에서 들어도 생각없이 들으면 마이통풍(馬耳東風)이다.

 

그들이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 예수쟁이가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성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믿음을 깨우치거나 강하게 할 길이 없다.

 

4.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성경에서 가장 큰 두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며, 네 지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만큼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달렸다” (22:35-40(NASB 역자 사역)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뿐 아니라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지성을 다하여(개역개정은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저자는 나는 이 말이 우리의 생각을 특정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는 뜻, 즉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길 때 느낄 수 있는 충만을 일깨우고 표현하는 데 우리의 생각이 전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p.95)고 정의하였다.

 

파이퍼는 여기서 생각에 지성을 사용해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지성의 전적 참여로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귀히 여기고/그분을 기뻐하며/그분을 찬미한다는 뜻이다. 생각은 사랑을 깨우고’, ‘표현하는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치 있게 여기고, 그분을 귀하게 여기며,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다.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은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길 때 느낄 수 있는 충만을 일깨우고 표현하는 데 우리의 생각이 전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p.101, 필자 강조)

 

5. 상대주의 폐해; 상대주의의 7가지 부도덕성.

 

생각은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데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지성을 달리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외부에는 인식가능한 객관적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이나 외부의 그 무엇에 대해서 믿을 만한 지식을 낳지 못하며, 다만 개인이나 공동의 선호와 시각을 표현할 뿐이라고 말한다. 곧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오늘날 만연한 사상이다.

상대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진술의 참과 거짓을 판가름하는 객관적인 외적 기준이 없다”. “외적 기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런 기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객관적 기준이 있고, 우리는 그런 기준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 기준은 보편타당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객관적인 외적 기준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나는 그 기준을 따르지 않겠다. 그 기준을 내 확신의 근거로 삼지도 않겠다. 나는 나 자신의 기준을 만들겠다.” (p.112, 상대주의자는 거역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다)

 

상대주의의 씨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는, ‘다른 기준에 다스림을 받으려는 인간의 죄악 된 욕망이다. 상대주의는 결코 일관된 철학 체계가 아니다. 모순투성이다. 상대주의자들은 살아가면서 절대적인 것에 일절 간섭받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보호막을 쳐 준다. 마태복음 21:23-37에 등장하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런 자들이다. 이들은 진리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종교에 빠진 자는 불쌍한 자다.

 

5.1. 상대주의는 거역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한다. (2:10-11)

5.2. 상대주의는 겉 다르고 속 다르다. 표리부동을 부추긴다. 비 모순율이다.

5.3. 상대주의는 교리적 이탈을 자주 숨긴다. 실용주의적 언어관. 얼버무림. 아리송한 말.

5.4. 상대주의자는 아첨으로 탐욕을 숨긴다. (살전 2:3-5)

5.5. 상대주의는 교만을 겸손으로 가장해 숨긴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

5.6. 상대주의는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 (8:31-32, 17:17, 살후 2:10)

5.7. 상대주의는 결국 전체주의로 이어진다.

 

공식은 간단하다. 상대주의가 오랫동안 횡포를 부리면, 사람들은 진리에 복종하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은 채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실상, 자유 사회의 모든 구조는 정직한 정도, 다시 말해, 얼마나 진리에 복종하느냐에 달렸다. 상대주의로 인한 혼란이 어느 선에 이르면, 사람들은 겉모양만 그럴듯한 질서나, 안전을 안겨 줄 통치자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넙죽 반긴다. 이렇게 해서 독재자가 등장해 철저한 통제로 혼란을 몰아낸다. 역설적이게도 상대주의 무제한의 자유를 크게 사랑하는 자 가 결국에는 자유를 무너뜨린다.” (pp.131-32)

 

상대주의는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치명적 독가스이다. 도덕적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가스다. 웬만한 부정부패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 서평자가 볼 때 최근의 한국 사회는 매우 위험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진리를 조롱하고 있다. 모든 비정상이 정상이 되었다. 지난 4.10 선거 결과를 보라. 정치/교육/언론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진리는 없다. 진리는 속박이다. 네가 보기에 옳은 대로 살아라. 네 느낌대로 살아라. 네가 좋은 대로 해라. 편한 대로 살아라. 네 멋대로 살아라”. 한국교회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나가는 말(결론); 모든 지식은 하나님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생각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하나님을 포기한 셈이다

 

(성경) 읽기는 곧 생각하기다. 생각해야 믿음이 성장한다. 견고해진다. 덮어놓고 믿으면 안된다. 건성으로 찬송하고, 주기도문을 줄줄 암송하는 것은 무익하다. 생각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성경을 포기하는 셈이다. 생각을 포기한다면 하나님을 포기하는 셈이다. 착각하지 말라. 성령은 하나님을 아는 지름길임을 약속한 적이 없다.

 

성령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지성과 감성의 눈은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논리만으로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제아무리 논리적으로 주장해도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7) 초자연적인 성령의 조명이라는 전기가 없으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또한 생각 깊은 선포(설교)라는 인간의 전선이 없으면, 빛을 보지 못한다. 전선이 전구를 밝히지는 않는다. 전기가 전구를 밝힌다. 그래서 마르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정의하였다. 논리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자연적인 성령의 조명은 전기’/그리스도 복음의 논리적 제시는 전선

 

생각하지 않으면 읽지 못한다. 주의 깊게, 성실하게, 일관되게 생각하지 않으면, 주의 깊게 성실하게, 일관되게 읽지 못한다. 삭막한 지성주의의 해결책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겸손하고, 성실하며,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꼼꼼한 생각이다” (p.142)

 

나는 공식 교육이 아니라, 불같은 사고를 호소한다

 

폭넓은 배움과 지성의 바른 활용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다. 박사들 중에는 생각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공식 교육을 거의 못 받은 사람들 중에도 생각이 아주 분명하고 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간곡히 호소해 건대, 부디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할 때 지성을 뜨겁게(가슴으로) 활용하기 바란다. 공식 교육을 더 받으라고 호소하는 게 아니다. 공식 교육을 더 받으면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을 얼마나 많이 또는 적게 받았든지 간에, 지성을 바르게 활용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하다” (p.147, 대개, 가방끈이 긴, 신학 박사(교수)들의 설교는 논리는 있지만 불은 없다)

 

서평자는 이 책을 여러 번 꼼꼼히 읽었다. 반지성주의/지성주의 둘 다 위험하다. 그러나 생각은 위험하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마음에 은혜가 깊이 역사하지 않으면 생각이 교만해진다. 그러나 은혜가 역사하면 생각(지성)은 겸손한 지식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이러한 겸손한 지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을 밝히는 기름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려고 힘쓸 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의 불은 결국 꺼지고 만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성경 연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실재를 연구하고, 그 실재에 대해 정확히 말하고 쓰며, 그 실재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그 실재를 활용해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중략)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연구한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반란이다” (p.198) 아멘 아멘, 할렐루야. ()

 

서평자는 생각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서 P.S(추신)으로 몇 자 인용한다.

 

생각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이르는 필수적인 길이다. 생각은 자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그 자체로서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기도가 빠진 생각, 성령이 빠진 생각, 순종이 빠진 생각, 사랑이 빠진 생각은 교만해져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서 하는 생각, 기도에 젖은 생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각, 성령에 메인 생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선포할 더 많은 이유를 찾는 생각, 사랑으로 섬기는 생각은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는 삶에 꼭 필요하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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