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부르심” 첫째날 새벽집회 김하나 목사 설교 전문
2023년 3월 1일 오전 5시 50분부터 시작된 서울 명일동 소재 명성교회 특별새벽집회에 1만 2천여 명의 성도들이 운집했다. 1부 집회에 영상으로 참여한 인원도 1,600여명이나 되었다.
이번 특별집회의 주제는 “위대한 부르심”이며 1부는 오전 5:50, 2부는 오전 7시, 3부는 8:30분 세 차례에 걸쳐 4일까지 진행된다.
이날 김하나 목사는 마태복음 20장 26절~28절의 성경본문으로 “위대한 부르심”이란 주제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 기독교는 부르심의 종교이다
“여러분 다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부르심의 종교이고요. 여러분이 지금 붙잡고 있는 성경은 부르심의 책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응답하여 곳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신앙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이미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르심을 자꾸 확인하고 붙잡아야 잘못된 길로 걸어가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을 살아가다가 느낌으로 ‘아 이렇게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한두 번은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점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우리가 그곳을 향해 달려가지 못하고 전혀 다른 곳으로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시대를 안다고 문화를 안다고 환경을 안다고 사회를 안다고 조금 세심히 둘러본다고 해서 더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신 곳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바라보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짊어졌지만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도 아니고 십자가도 아니고. 이 세상의 허망한 것들, 헛된 것들 다 부질없는 것들을 짊어지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르심은 우리 삶의 목적지를 향해 갈 때,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지도와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 안에도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다시 되찾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성경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잠깐 생각해 볼까요? 노아가 있습니다. 노아는 산 위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가 특별히 배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었고, 만든 것이 취미인 사람도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기 시작했고 완성했습니다. 우리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고향인 하란 땅을 떠나서 우르를 떠나서 가난으로 향해 내려갔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진중에 거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여리고성에 살고 있었던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라합을 불러주셨고 라합은 거기에 응답하여서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에 올라가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어린 목동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뭐 수많은 선지자들, 부름받은 선지자들을 우리가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셨고 세리였던 마태를 부르셨고 의사였던 누가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부름을 받아서 성경에 있는 사람들 한명 한 명을 여기 다 적을 수도 없는 겁니다.
◆ 부르심에 대한 오해
근데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부르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장 7절에 말씀 우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러분이 성도라면 우리는 다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지금도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이 있어서 아니면 직업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만 부르심을 받았다 라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에 초점을 맞추기가 쉽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늘 우리에게 곤란한 부분이 왜 그렇습니까? 마르다는 일을 했는데 칭찬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일을 하면 칭찬받아야 하는 머리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또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이 있어서 아니면 직업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만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에 초점을 맞추기가 쉽습니다. 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늘 우리에게 곤란한 부분이 왜 그렇습니까? 마르다는 일을 했는데 칭찬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일을 하면 칭찬받아야 하는 머리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우리 개신교적 종교 개혁적 오류라고 말합니다.
일이 중요하죠. 그러나 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 정말로 귀한 응답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참 귀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부르심이 그렇습니다. 꼭 여러분이 직장으로 일로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재능으로 부르심을 받아야만 부르심이 아니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것 자체가 가장 귀한 일이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도 부르심이라는 것을 특별한 어떤 직업적인 목적만 갖고 절대로 쓰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에는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그냥 우리가 일상생활에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모든 부르는 아주 평범한 그 모든 일상을 부르심의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직업을 가졌던 어떤 일을 하든 먼저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성도로 부르신 그 부르심을 되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 부르심의 정의
제가 먼저 부르심의 정의를 내리고 가는데요. 여기가 이야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새벽에 쉽지는 않은데요. 한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주 유명한 책이죠. 오스티니스의 소명은 부르심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한 문장으로 좀 설명을 드릴게요. 제가 이렇게 한번 해석을 해봤습니다. 소명이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우리의 삶을 드리는 행위이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자체가 부르심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소명이라는 이 부르심이라는 것은 믿음의 삶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내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 자체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러면 오늘 주제는 위대한 부르심일까요? 왜 위대함이 들어갈까요?
◆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거를 어렵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죠.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하심의 일들은 위대한 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높은 자리로 가야 위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내가 위대한 일을 해야 위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모든 부르심은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3월 특별집회에 이렇게 많이 모여서 오늘 사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많이 나오실 줄 몰랐는데 진짜 많이 나오셨습니다. 우리 구 성전도 가득 찼고 많은 곳들이 채워졌습니다. 근데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여서 대단한 집회여서만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는 위대하고요.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은 위대합니다. 우리의 작은 아이들의 예배도 위대하고 하나님과 연관된 것은 위대함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신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아주 작은 무명의 사람을 부르실 때도 그것은 위대한 부르심에 해당합니다. 넘기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르심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 부르심은 섬김이다
오늘 본문 말씀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종이 되라고 섬기라고 하시는 말씀은 위대한 부르심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하찮은 작은 부르심에 가깝습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우리가 정말 한 건 올리자 대단한 자리로 가자 그런 마음을 갖고 간 사람은 제가 볼 때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봤죠. 예수님께 행하시는 일들,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먹을 것이 늘어나서 12광주가 남고 귀신이 막 쫓겨나가고 이런 일들을 보면서 야 이거 정말 큰일 나겠다, 대단한 일이 생기겠다 하면서 그 마음에 야망이 생겼습니다. 부르심은 어디로 사라졌고 위대함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예수님께 한 어머니죠 살로메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와서 예수님께 아주 노골적으로 한 자리를 요청합니다. 예수님 나중에 보자. 한 자리씩 우리 아들들에게 주시죠. 좌편에 우편에 우리 아들들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하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말씀인 겁니다. 야 그런 거는 이방에 더 저런 사람들이 다 원하는 것이 정말로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아멘.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이며, 또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오늘 되찾아야 하는 예수님의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모든 부르심은 깊어져야 합니다. 심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2차 소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1차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만 더 깊은 부르심으로 나아가야죠.
그런데 우리는 그냥 잘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그러한 제자와 같은 마음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면 왜 하나님은 나를 저 기업의 회장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나를 왜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려주지 않으시고, 나를 왜 더 귀하게 쓰시지 않는가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거기에 시험이 들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잘나가는 사람들 만나면 거기에 대한 시기심이 생기죠. 왜냐하면 나의 부르심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면 저 사람이 어떻게 불렀는지는 신경 쓰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요한이 얼마나 오래 살지는 신경 쓰지 말아야 돼요. 근데 베드로는 그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이 있으면 다른 곳은 절대로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부르심으로 더 깊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얕은 곳에서 머물러 있는 이 제자들을 더 깊은 곳으로 불러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위대한 부르심이며 바로 그것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부르심이라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을 갖고 이 말씀을 붙잡으셨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이번에 나 제대로 불러주시나 보다. 나를 높은 곳으로 승진시켜주시고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시나보다라는 생각을 갖고 오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번 특별 세배 집회에 말씀은 우리를 위대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시지만 그 자리가 섬김의 자리여야 한다는 것이 그 자리가 예수님처럼 누군가에게 종이 되어주는 섬기는 사람이 되는 그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께서 보실 때 오히려 더 큰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할 줄로 믿습니다.
◆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
그래서 여러분 이 말씀을 이 부르심을 마음에 새기고 성경을 열어보면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위대한 삶을 살았는데 그 삶 가운데 섬김의 자세가 있었다라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호칭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종, 우리가 뭐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 오히려 몇 명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람들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을 함께 가졌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이사야. 여러분 이 네 사람이면 이미 성경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장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자들 가운데도 한나와 같은 여인은 내가 하나님의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사야에 나오는 고난의 종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 고난의 종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도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본체임을 거부하시고 우리의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께서 부르신 그 모든 일들을 완수하셨습니다. 종이셨기 때문에 완수한 겁니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스로를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둘로스, 둘로스는 좀 더 심화된 거예요 노예입니다. 완전한 노예 종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왕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왜 사도들이 스스로를 종이라고 불렀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 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종이라고 불렀을까요? 우리가 좀 더 도덕적이기 때문에 좀 더 윤리와 윤리적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좀 더 훌륭해서 종이라고 표현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종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종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종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도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종이 아니라 내가 너보다 윤리적이고 내가 너보다 믿음 생활 오래 했고, 내가 좀 더 깊은 사람이야. 내가 좀 예배 좀 드리는 사람이야 라고 해서 내가 종이 되는 것은 우월성의 종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우월적인 종이 되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우월한 종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섬기는 자세이며 내가 낮아지는 것이며 남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말로만 종이 되면 여기는 종 싸움이 벌어집니다.
우리 세상이 왜 싸움이 많습니까? 스스로는 종이라고 하지만 교회에서 스스로는 종이라고 하지만 결과적 안에는 우리가 종이 아닌 바로 우리가 섬김을 받는 사람의 자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이렇게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크고자 하면 섬겨야 합니다.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부르심인 줄로 믿습니다.
◆ 부르심의 첫 번째 과제, 떠남
제가 오늘 아브라함에 대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한 꼭지만 말씀을 드리고 내일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르심의 첫번째 모델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구별함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당연한 순서죠.
여러분, 성경의 모든 당연한 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첫 번째인가? 아브라함 꼭 첫번째 다뤄야 하는가? 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첫번째 것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모델링,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죠. 그의 아버지의 땅, 그의 고향 땅 하란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난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 가장 먼저 가나안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곳에 정착하며 예배하는 믿음의 조상이 나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가져야 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 1절 말씀 우리 함께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떠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믿음의 행위는 모든 부르심의 행위는 떠남으로 시작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다 모두를 부르실 때 그들은 물고기 잡던 배를 떠나서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가족들을 내려놓고. 그들이 하고있는 가업과 전문직이죠. 잘먹고 잘사는 곳 다 내려놓고 떠나서 주님을 따라갔다는 것이죠.
부르심이 있는 곳에는 떠남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께 부름받은 백성이 되려면 우리가 떠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세상의 즐거움을 떠나고 세상의 모든 유행을 떠나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하란이라고 하는 주제가 굉장히 방대한 주제입니다. 하란을 우리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하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제와 비추어 본다면 하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란은 우리가 떠나야 하는 하란은 바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그토록 구했던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이방인의 집권자와 고관의 자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처럼 살길 원하는 대접 받고. 사람들에게 섬김을 맡고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며 살기를 원하는 그 자리,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하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하란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는 그 자리를 떠나서 우리가 말씀하시는 섬김의 자리, 가나안은 섬김의 자리예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브람이 가나안에 가서 첫번째 정착한 도시가 세겜입니다.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란의 모든 편함과 익숙함과 문화를 다 내려놓고 이 가나안으로 내려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제가 오늘 말씀의 주제를 비추면서 아브라함을 생각해 봤습니다. 아브라함의 많은 모습들이 우리에게 본이 되고 가장 귀한 모습들로 제시되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섬김의 자세를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사람들을 섬겼으며 정말 이 땅에 복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섬겼는지를 우리는 오늘 내일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위대한 부르심은 떠남에서 시작된다
3월 특별새벽 집회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의 위대한 부르심은 바로 떠나면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앞으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보기 되었는지를 우리가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또 이 사회에 복이 되게 하시려고 연약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뜻을 이루시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첫 번째 날 여러분 정말로 힘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모여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찬양대가 우리 예배당의 반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우리 남선교회 또 권사회 주님의 종들이 성가대 찬양을 귀하게 해주셨습니다. 새벽 일찍부터 나오셔서 귀한 찬양해 주신 찬양대에 감사드리며 박수로 축복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휴일이라고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늘 3월 특별새벽집회를 3월 1일 공휴일로 시작을 하는데, 어떤 분들은 공휴일 날 더 주무시고 싶으세요. 오늘 정말 오랜만에 회사 안 가는데 푹 자자. 근데 오늘 이렇게 잠을 포기하고 우리 많은 어린아이들이 학생들이 이렇게 방학 끝나는 내일이면 다 개학인데 좋은 날 다 갔습니다.
내일부터 학년 올라가고 새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들어가고 바쁜 날들이 시작되는데 오늘 마지막 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시고 우리 아이들을 정말 귀하게 이 땅에서 위대한 부르심으로 부르셔서 이 땅에 필요한 아브라함과 같은 주의 자녀들 삼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나온 학생들 정말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박수로 축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또 우리 3월 특별새벽집회에 우리 여러 목사님들과 기관들과 또 기독교 단체 여러 곳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중에 제가 제일 감사한 분은 우리 청운교회 이필산 목사님과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감사 박수로 축복하겠습니다.
이 시간은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찬양이 떠올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이 이 말씀과 굉장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여기에 창조와 부르심과 사명이 다 들어있어요.
보내시는 거는 사명이고요. 부르신 건 소명이고 지으신 건 창조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 하나님의 모든 주권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찬양이 참 신학적이다 굉장히 탄탄하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오늘 우리 마지막 이 시간 함께 찬양 잠깐 부르고 또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와종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